2천년 전에 예수님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주님은 이들에게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그러자 예고도 없이 번개가 쳤습니다. 사실, 그것은 작은 회오리 바람에 가까웠습니다. 오순절에 닥친 것처럼 번개가 오늘 우리를 칠 수 있습니다. 거센 바람과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불의 혀가 우리 각자 위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역 사회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목적을 위한 중요하고 역동적인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교회를 세우기 위해 내려오셨습니다. 그럼 성령이 침투하는 교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세 가지 특성이 핵심입니다. 권능, 비전, 임재입니다.
1. 권능. 오순절은 성령의 능력의 증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설교했고 3,000명의 영혼이 교회로 들어왔습니다. 그게 권능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로마 제국 전체를 휩쓸었습니다. 능력이 약속되었고 능력이 전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의 맷돌에 지옥 문의 권세를 깨트렸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 가운데 무력감보다 더 슬픈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라고 우리는 끙끙거립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산을 향해 명령할 수 있습니다! “옮겨져라. . .” 성장하는 교회에 대한 모든 연구는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회중의 태도가 결정적인 요소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생동감 있고 성장하고 봉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긍정적인 생각의 힘이 아닙니다. 그것은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2. 비전. 오순절은 유월절 50일 후에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축제를 위해 세계 전역에서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레위기 23장과 신명기 16장을 보면 구약의 백성들은 그날ㅇ 여호와 앞에 모여 예배하고 즐거워했습니다. 누가 초대되었습니까? 본인과 자녀와 노비와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 등 거의 모든 사람이 초대되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가 맞은 첫 번째 오순절에 예루살렘이 붐비는 것도 당연합니다. 그렇게 많은 다른 언어가 사용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기에 절대적으로 완벽한 때였습니다. 성령께서 성별, 피부색, 경제적 지위 또는 연령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셨습니다.
6~7세기에 스콧틀랜드의 셀틱 기독교의 수도사들은 극도의 빈곤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비세속적이었고 겸손을 실천했습니다. 켈트족 기독교인들은 기러기를 성령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생각했습니다. 비둘기 같은 성령의 형상이 너무도 익숙해지고 길들여진 형상이 되어 우리는 성령의 활동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러기는 우리를 안주하지 못하게 하는 시끄럽고 성가신 새입니다. 지금 기러기 같은 기독교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우리는 안일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오는 이유 중 하나는 우정을 쌓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서로를 세울 수 있게 해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우정을 교회 사람들에게만 제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어떻게 소금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누룩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영향을 미치려면 세상에 있는 사람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는 온갖 것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가 그들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들의 필요를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의 성소에서 거리로 나서야 합니다. 우리는 안전한 관계에 머물기 보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 모든 사람들과 접촉해야 합니다.
3. 임재. 스위스의 의사이자 상담가인 폴 투르니에는 자신의 책 “창조적인 고통”에서 “고아가 세상을 이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고 놀랐다고 회상합니다. 권위 있는 의학 저널에 실린 이 기사는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지도자 300명의 삶을 조사한 것이었는데요. 투르니에에 따르면 이 모든 지도자들은 부모의 죽음이나 이별을 통해, 또는 심각한 어린 시절 박탈의 결과로 정서적으로 고아로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이들 고아의 목록에는 알렉산더 대제, 줄이어스 시저, 조지 워싱턴, 나폴레옹, 빅토리아 여왕 같은 인물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르니에는 자신이 고아였고, 아내가 죽은 직후 노년에 다시 한번 자기가 고아라고 느꼈을 때 고아 현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그는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성공 또는 비극, 선 또는 악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운이 좋든 나쁘든 상황이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생은 있는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자손은 모세와 함께 약속의 땅으로 여행할 때 불을 가지고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 (레위 6:13) 그 불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임재를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레위기 9장 24절에 따르면 실제로 고대 이스라엘의 제단 위의 불은 하늘에서 불붙었습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단 위의 번제물과 기름을 사른지라 온 백성이 이를 보고 소리지르며 엎드렸더라!” 오순절에 각 신자 위에 나타난 불은 바로 그 불이었습니다. 결국, 이 예수님의 추종자들은 새로운 이스라엘, 즉 고대 불꽃의 새로운 운반자들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바로 우리입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편안하지 않거나 무력하거나 목적 없이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거센 바람이 불었습니다. 불의 혀가 하나님의 제단에 붙었습니다. 우리는 그 불꽃을 지금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권능과 비전과 임재를 통해서 힘차게 앞으로 전진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