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장례식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베다니라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나사로라는 사람의 장례식입니다. 예수님의 절친 나사로가 앓던 병이 심해져 거의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누이들이 예수님께서 급히 오도록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확신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오시기로 하신 주님께서 지체하는 동안 앓던 나사로는 죽었고 그의 누이들이 그를 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사실 나사로의 가족들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그분의 스케줄을 급히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이기적인 스케줄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유대로 돌아오시는 일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그분과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결국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살던 베다니에 도착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오늘의 사건에서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남기고 계십니다.

1. 죽음의 사실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 첫 번째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밝히 말씀하셨다. ‘나사로는 죽었다.’” (요11:14)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불가피합니다. 그 죽음은 누구에게나 확실히 다가옵니다. 다만 죽을 날만 불확실합니다. 모두 존재 가운데 인간만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생명체와 달리 인간만이 다가올 죽음의 고통을 잊으려고 몸부림 칩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 가운데 죽음을 없애려는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사망 보험 대신 생명 보험에 가입합니다. 그러나 약관을 잘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것을 수령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죽었을 때만 그 혜택이 주어집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사망보험이라 부르지 않고 생명보험이라 부릅니다.

사람은 지성을 통해서 죽음의 사실에 대비하려 합니다. 오늘날 죽음을 전문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죽음이라는 헬라어 단어 “타나토스”에서 유래한 “죽음학자”라는 명칭으로 불립니다. 놀랍게도, 미국의 모든 대학에서, 수시로 사망과 불멸에 관한 세미나가 열리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전도서 8 장 8 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바람을 다스려 그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듯이, 자기가 죽을 날을 피하거나 연기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

2. 죽음의 힘을 예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가 확실히 죽었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알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그가 병든 나사로를 늦게 방문한 이유입니다. 그는 마침내 베다니에 도착해서 나사로의 누이 마르다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전과 달리 예수님이 오셨다고 흥분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차갑게 주님에게 말했습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11:21)

마르다의 이 표현은 오늘날 우리 입에서 자주 반복되는 말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어머니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아기가 살아났을 것입니다.” “주님, 주님이 여기에 계셨더라면, 내 사업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자주 마르다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다가온 죽음의 현존은 하나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르다의 불평 섞인 말을 들은 예수님은 곧 이어 두 번째 교훈을 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25-26)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왜 나사로가 죽는 것을 허락하셨는지를 배웁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사로의 치유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의 부활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우리에게 나쁜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썩지 않은 것, 즉 궁극적인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여러분에게 세 번째 요점을 말씀드립니다.

3.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두 누이인 마르다 그리고 마리아와 이야기를 나누신 후에, 그들과 함께 나사로의 무덤에 도착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흔히 보는 조문객과 너무나 다르셨습니다. 그는 죽은 나사로를 문상하려고 그곳에 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곳에서 놀라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돌을 옮겨 놓아라.” (요11:39)

이스라엘의 무덤은 주로 산허리의 동굴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석회암이 잘리고, 흙과 암석이 제거된 움푹 패인 동굴 안쪽으로 무덤을 위한 자리가 만들어지면, 사람들은 들짐승과 강도로부터 시신을 보호하기 위해 입구에 큰 돌을 막음으로 장례절차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대뜸 다시 “돌을 옮겨 놓아라”고 하시니 모든 사람들이 자기 귀를 의심했습니다. “시신을 다시 보시려는 이유가 뭔가?” 사람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반신반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의 숙덕거림에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무덤 앞에서 나사로를 향해서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 위대한 명령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 두 마디의 명료한 말씀이었습니다.

이윽고 죽었던 사람이 둘무덤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손발은 천으로 감겨 있었고, 얼굴은 수건으로 싸매여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주어서, 가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붕대로부터 나사로를 해방하셨을 뿐만 아니라, 나사로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셨습니다.

나사로에게 잊지 못할 기적을 행하신 주님은 얼마 뒤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분도 또한 붕대로 감긴 채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가 누운 무덤은 돌로 인봉 되었지만, 사흘 만에 그는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결코 다시 죽지 않으셨습니다. 이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던지고자 하시는 질문은 이것입니다. 그것은 2천 년 전에, 마르다에게 하셨던 질문과 동일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아니할 것이다. 네가 이것을 믿느냐?” (요11: 25-26)

백동인목사ㅣ갈보리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