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선다. 오늘은 정년퇴직한 직장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다. 같은 시기에 퇴직한 동료들과 석달에 한 번씩은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세월이 가면서 점점 만나는 횟수가 줄어든다. 처음에는 열두 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많이 나와야 일곱 명 정도다.

이유는 간단하다. 겨울이면 비가 많이 내리는 오레곤주를 떠나 아리조나, 마이애미로 이사를 한 친구들도 있고, 여행 중인 친구도 있어 매번 인원수는 줄어든다.

이번 모임에는 여섯 명이 모였다. 지난번에 참석 못 해던 국장님은 퇴직한 후 축구코치 조수로 일하면서 학생들과 함께 뛰는 시합에 응원오라고 지원을 부탁하는가 하면, 또 한 친구는 스페인에 한 달간 갔다온 이야기로 이어갔다. 다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 마음이 즐겁고 반가웠다. 운전 조심하고 건강하자고 서로 위로 하며 헤어질 때 한 친구가 남편과 같이 다음달에 두 아이를 입양하러 중국으로 간다고 말을 꺼냈다. 입양이 쉽지 않을 텐데 그런 결심을 한 친구가 존경스럽고 장하게 보였다.
입양이란 말을 들으면 나는 가슴이 뭉클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학생 때 미 대사관에 근무하던 캔 리취드슨(Ken Richardson)이라는 사람에게 영어 개인 지도를 받은 적이 있다. 자주 집에가서 지도를 받았기에 부인인 메리 리취드슨(Mary Richardson)하고 친하게 지냈다. 애가 없는 그 부부는 입양을 원했고 나는 그들을 도와 보육원을 함께 다니며 일을 도와주었다.

서류가 모두 정리되고 그들이 원하는 아이를 보기로 했다. 부부는 혼혈아보다는 한국 여자 아기를 원했기에 우리는 많은 고아원을 다녔다. 지금처럼 입양 절차가 세계적이지 않았기에 그들이 원하는 아기를 직접 찾아다닐 수 읶을 때 였다. 인왕산 남동 기슭 사직 공원 필운대에 있는 고아원에 가보니 2-3살의 여자아가들과 남자아가들이 가득히 강당을 메우고 있었다.

메리와 나는 강당을 열 바퀴 이상 돌면서 많은 어린애 중에서 예쁜 아이를 선택했다. 그 아이는 3살, 눈이 몹시 크고 순해 잘 웃었다. 메리가 그 아기를 안아본 순간 아가는 메리의 긴 노랑머리가 색달라 보여선지 작은 손에 한 줌 쥐고 입에다 넣고 좋아 마구 웃어 보였다. 그 모양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모두 함께 웃었다. 남편 캔도 아가를 안아보고 무척 좋아했던 순간이 눈에 아직도 선하다. 메리를 도와 아기 보모를 채용했고 아기옷도 많이 사왔다. 우리는 분홍색 페인트로 방 색깔로 바꾸었고, 예쁘게 수놓은 분홍 이불도 새로 준비한 장식장에 넣어두었다.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난감도 미국에서 부쳐왔고 이것저것을 준비하는 메리와 함께 내 마음도 들떠 있었다. 윈디(Wendy)라고 이름 지은 아기가  온 날은 주위 친구들을 모아 환영 파티도 해주었다. 흥분의 날이 채 가시기 전 메리가 울면서 보모를 내 보내야겠다고 하소연했다. 윈디가 보모만 따르고 엄마인 메리 곁에는 오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모 곁에서 떠나지 않고 저녁에 퇴근하는 보모의 치맛자락을 잡고 소리소리 지르며 안 떨어지려고 운다고 했다. 눈과 피부 색깔이 다른 미국인 보다는 같은 색깔의 동양인 보모가 어린 마음에도 정이 더 가나 싶었다.

결국, 보모를 내 보내고 메리의 인내는 시작되었다. 메리는 윈디를 울면서 따라다녔고 윈디는 울며 도망가고, 서로 쫓고, 쫓기면서 애원하며 달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윈디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데 무척 힘들어했다. 메리의 꾸준한 정성으로 두 모녀는 서로의 얼굴을 익히고 정을 나누는데 6개월이 넘는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내가 공부하러 가서 말만 걸어도 윈디는 참았던 울음을 “앙”하며 내 품에 안겼다. 집에 가려고 나올 때마다 내 목을 끌어안고 울어대는 바람에 나도 울고 또 한바탕 집안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우리 모두 무척이나 울었던 윈디의 소식을 가끔 메리에게서 전해들었다. 윈디가 일곱 살 때 미국 시민권을 받고 찍은 사진을 보내왔고 발레를 배운다는 편지도 왔다. 서로 바쁜 생활에서 소식이 끊어진 것은 그 후 몇 달 뒤에 일이었다. 내가 하와이에서 워싱턴 주로 이사 오면서 메리의 고향이 오레곤 이였다는것이 생각났고, 그 꼬마 울보 아가씨는 얼마나 예쁘게 컸을까 이따금 생각을 하기도 했다.

입양되어 성공한 분도 많이 있다. 권오복은 7살 때 프랑스로 입양된 후 변호사의 아들 장뱅상 플라세(jean-Vincent Place)로 성장하여 프랑스 상원의원에 당선되었고, 어머니를 시장에서 잃어버린 김봉석(Toby Dawson)이란 어린이는 1981년 홀트 아동복지회를 통하여 미국에 입양되어 2006년, 미국 대표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여 동 메달을 땄다. 또한, 내가 사는 미국 워싱턴주의 상원의원을 역임한 신호범(Paul Shin)씨도 구두닦이하던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입양된 분이다. 신호범 씨는 “피는 물보다 진하지만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라고 입양해 주신 양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글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사랑만큼 쉬운길이 없고, 사랑만큼 아름다운 길이 없다는걸 알고 있는 분의 이야기다. 윈디도 새 부모를 만남으로 깊은 상처의 아픔을 잊고 자기한테 주어진 몫을 불평 없이 잘 다스리는 좋은 인격의 소유자의 아가씨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삶은 도전해야 할 것 투성이다. 투쟁하며 도전하며 얻어진 열매는 달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이 아니라도 가슴으로 낳은 사랑으로 이루어진 입양. 부모와 자식으로 살아 간다는것도 하늘이 엮어준 하나의 만남이며 인연이다. 이 귀중하게 엮어진 삶의 흐름속에 모든 입양아들에게 많은 축복이 내리기를 기도한다.

묘한 인연으로 나는 윈디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너무나 우연한 계기로 만나게 되었기에 이것은 필연이라고 생각이 든다. 계약서류를 결재하러 국장 사무실에 가니 그곳에 인사하러 온 새로 부임한 장교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가끔 우리 사무실에 오는 소령이 하루는 나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기 여자 친구도 한국에서 왔다고 했다.

얼마후 소령과 같은 공사업무를 맡아 일이 완성될 때까지 만나는 횟수가 많아졌다. 현장에 오고 가는 차 속에서 공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가끔 사생활 이야기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알고보니 그의 여자 친구의 이름이 윈디라고 하며 6살의 아기가 있는 이혼한 여자라고 했다. 나는 옛날에 입양에 도움을 줬던 윈디 이야기를 들러주며 그 울보 아가씨가 어느 곳에 있는지  보고 싶다 했다. 다음날, 출근하니 자기 사무실로 와 달라는 소령의 메모가 있었다. 간밤에 현장에서 급한 일이 발생한 줄 알고 그의 사무실로 달려갔다. 그는 웃는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어젰밤 집에 돌아가서 낮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여자 친구에게 전 했더니, 자기 아버지 어머니 이름이 내가 알고 있는 같은 사람들이었다. 어머 이럴수가! 묘한 인연이었다. 이럴수가!!

뛰는 가슴 안고 다음날 메리와 윈디를 만나러 갔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구석에 해 바란 노인 여자가 손을 들며 반겼다. 길에서 보면 알아볼 수 없도록 메리는 많이 변해 있었다. 25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어찌 안 변할 수가 있을까! 우리는 서로 부퉁켜안고 눈물을 흘리며 반가움에 떨었다. 옆에는 예쁘게 생긴 윈디가 무심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지난날들을 이야기하는 동안 메리는 계속 울고 있었다. 미국에 돌아온, 얼마후 남편과 이혼했고 메리 혼자서 윈디를 기르며 살았다고 한다. 생활이 윤택해 보이지 않았고 왠지 찌들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 윈디는 참 예쁘게 성장했고 어느 누가 보아도 탐을 낼만한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며칠후 메리, 윈디와 아기, 소령을 집으로 초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숙명처럼 깊은 우리들의 인연을 이야기하며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냈다. 사실 나는 윈디와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고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내목을 끌어안고 울던 울보가 생생하게 내 기억속에 있었기애 마치 잃었던 딸을 만난 기분이었다. 윈디도 어린 시절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고 한국에 대해 알고 싶어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국 가보고 싶지 않아?만약 그렇다면 시간내서 한번 가. 같이 가 줄께”

“아니”

한마디로 거절을 했다. 말문이 막혔다. 윈디는 차갑고 냉정했다. 예상치 않았던 대답에 곤혹스러웠다. 난감한 내 표정을 보며 윈디는 말을 계속했다. “내가 생각나는 한국은 울음뿐이다. 그래서 싫어. 나를 버린 부모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어.”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고 숨이 막혔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한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 난 윈디를 만나지 않았다. 윈디는 제 과거를 알고 있는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얼마후 메리는 여동생 집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들과 소식이 끊어졌다. 이따금 소령을 사무실 복도에서 보면 윈디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어느 날 아침에 소령이 사무실로 나를 찾아왓다. 동생 집에서 들와오면 연락하겠다던 메리가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했다.

그날 저녁 나는 윈디를 만났다. 윈디는 늘 외롭게 자랐다고 이야기하며 많이 울었다. 태평양 바다 건너 피부색이 다른 가족에게 입양된 후 다시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양부모의 눈치를 보며 피나는 노력을 하고 살았다고 했다. 어린 시절은 혼자서 자기를 버린 친부모를 그리며 울었던 어둡고 슬픈 기억뿐이라고 했다. 정확한 나이도 모르기에 입양한 날이 생일로 정 해졌고 어쩌다 같은 피부색의 학생을 만나면 무엇인가 연결되는 한 민족, 한 언어, 단일성과 순수혈통성의 이데올로기를 찾아 방황하며 살았다고 했다. 늘 존재부터 거부 당했다는 느낌과 배반으로 받은 무서움은 남에게 정을 주기가 힘들었다고 했다. 자기는 버려진 아이라는 생각으로 괴로웠다고 했다. 양부모가 이혼한 후 엄마인 메리는 약물 중독으로 폐인이 되어 어두운 생활을 하였다. 모든 고통의 원인은 자기를 버린 한국의 친부모로부터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되어 용서할 수 없다고 울며 말했다. 만 가지의 고백을 듣고 나는 왜 그가 한국의 뿌리를 부정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은 윈디가 태어난 곳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버려진 곳이기도 했다.

며칠 후 장례식은 몇몇 친지와 함께 간단한 예식으로 끝났다. 그 날 윈디는 울지 않았다. 다시 고아가 된 윈디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입양이 되어 새로운 가정이 생겼다고 해서 잘 지내고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잘난 부모 만나 행복해 지라고 믿었던 것도 나의 착각이었다. 상처가 깊을수록 치유될 수 었었던 어린 마음, 제거될 수 없었던 친부모에 대한 미움과 용서할 수 없었던 마음, 훌륭한 교육 환경 속에서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키워준 양 부모도 있지만, 현실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상처투성인 입양아도 많다고 느껴졌다.이것이 입양의 슬픔일까?

장례식장에서 나오니  형형색색의 고무 풍선을 한 사람,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다. 동시에 풍선을 하늘로 날려보냈다. 여름을 맞을 준비하는 초목은 더없이 싱그러웠다. 파란 하늘빛에 조화된 오색 무늬 풍선이 둥실둥실 뭉재 구름 타고 날았다. 애틋하게 멀어져가는 풍선을 향하여 나는 기도드렸다.

입양된 모든 아이에게 하나님  원하옵건데, 미움이 있는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곳에 용서를, 절망이 있는곳에 소망을, 슬픔이 있는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눈물이 흐른다. 풍선이 모두 날아간 하늘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추억이란 가끔씩 아름다운 구슬처럼 꿰어지는데, 메리와 윈디의 추억은 입양아의 슬픔으로 내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다.

김혜자(Nancy Moore) / 오레곤문인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