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기성세대는 원래 혼자 음식을 먹는 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려서 받은 가르침의 영향이 컸습니다. 어릴 적부터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먹는 데 익숙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부모가 일터에 나가 있는 동안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바깥에서도 혼자서 밥을 먹는 아이들로 자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혼자서 밥을 먹는 것은 사회적 힘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를 잃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어젯밤에 모든 미국인의 22 %가 혼자 저녁을 먹었습니다. 오늘날 혼자 레스토랑에 가고 혼자 바에 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혼밥”, “혼술”로 상징되는”나홀로 문화”는 전 세대에 걸쳐 확산되는 추세입니다.

그것을 반영하듯, 최근 한 갤럽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10 명 중 3 명이 항상 외롭다고 답했습니다. 외로움은 시도 때도 없이 모든 삶의 구석구석을 파고들고 있습니다. 돈으로 그것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힘으로 그것을 누를 수도 없습니다.

한 소설가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외로움은 희귀하고 흥미로운 현상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중추적이고 불가피한 사실이다.”

세계에서 가장 외딴 곳은 외로운 사람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시편 102 편의 저자는 실제 외롭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는 6 절과 7 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광야의 올빼미와도 같고, 메마른 땅의 부엉이와도 같이 되었다. 내가 누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 마치, 지붕 위의 외로운 새 한 마리와도 같다.”

그는 자신이 광야에서 홀로 밤을 새우는 올빼미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는 폐허더미에 고립된 채 오도가도 못하는 부엉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는 집안에만 갇혀 있는 참새 같았습니다. 저는 오늘 특정한 건물 안에 자신을 가두고 살아가는 많은 분들의 처지가 이와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이 어떻게 이 외로움의 구름 위로 날아오를 수 있을지를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1. 외로움이란 무엇인가?

이제 홀로 있는 것과 외로움의 차이점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외롭지 않게 혼자 있을 수 있습니다. 사실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홀로 있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더라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수천 명의 사람들로 붐비는 안에서도 여전히 외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도시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함께 외로운 곳”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외로움은 쓸쓸함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로움은 공간에서의 고립이 아니라 영혼의 격리입니다. 외로움은 여러분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거세되고, 주목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관심을 끌지 못하고, 필요 없는 존재인 것처럼 느끼도록 만듭니다. 외로움의 침묵은 고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귀청이 터질 것 같이 생생하게 들려옵니다.

아내, 혹은 남편이 일을 하거나 출장을 떠나고 없을 때, 그래서 텅 빈 집의 외로운 침대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옮길 때 여러분은 진한 외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다 큰 자녀들이 성장해서 다른 지역의 도시로 이사를 갔고, 배우자도 세상을 떠난 집에 적막 만이 고요히 맴돌고 있을 때 여러분은 정말 외로울 것입니다.

아무도 더 이상 쓰지 않는 우편함에 광고물만 가득 쌓여갈 때 여러분은 외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더 이상 카톡이나 전화할 곳이 없고 걸려오는 카톡이나 전화 음도 종일 없을 때 여러분은 외로움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일 것입니다.

참혹한 시대를 살다 간 시인 윤동주는 감옥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이렇게 썼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시인 노천명은,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초가 지붕에 박 넝쿨 올리고 사는 것은, 부엉이가 우는 밤도 외롭지 않고 여우 나는 산골 애기를 하고 삽살개가 달을 보고 짖는 행복한 세상을 기대하기 때문이라고 썼습니다.

노천명은 이 시로 자신의 죽음을 예고했습니다. 그녀는 현재의 외로움을 이겨낼 방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고독으로 현재의 고독을 이겨내려 했습니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한 청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주 창문을 열고 교실 밖을 향해 돌을 던졌습니다. 마침내 교장이 그 소년을 찾아내 물었습니다.

“창문 밖으로 돌을 던지는 이유가 뭐니?”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죄송해요…. 나는 단지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었어요!”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돌을 호주머니에 잔뜩 집어넣고 다니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경멸하는 이유는 그것이 너무 파괴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독은 심각한 심리적 손상을 초래합니다.

정신과 의사를 찾는 사람들의 80 %는 주로 외로움과의 감정적 싸움에서 지쳐서 찾아온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파괴적인 외로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살로 삶을 끝내고 있습니다.

쥬디스 버커넬이라는 여성은 오래 전에 마이애미에서 온 몸에 7 차례나 칼에 찔린 채로 살해되었습니다. 죽을 당시 38세였던 이 여성은 살해 당시 일기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비서로서 아주 성공적으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회적 부랑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직장에서 매우 존경받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멋쟁이였습니다. 그녀는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아파트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그녀가 너무 외로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유일한 문제는 그녀가 외롭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나는 늘 혼자야.” 그녀는 또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누군가와 뭔가를 나누고 싶다.” 그녀는 그 어떤 이유에서 칼에 찔려 죽었지만, 그녀의 심장은 오래 전에 외로움에서 이미 멈춘 상태였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외로움 때문에 사랑에서는 늘 패자로 살았습니다.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56 개월 동안 59 명의 연인을 사귀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속에서 사랑을 결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녀가 살해되기 오래 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썼습니다.

“나를 누가 사랑할 것인가? 나는 너무 나이 들었고,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을 원하지도 않고, 이미 버려지고, 쓰러진 나를…… 나는 울고 싶고 영원히 잠들고 싶다.”

그녀가 일기장에 남긴 마지막 말은 “나는 혼자야. 누군가와 뭔가를 나누고 싶다” 였습니다.

여러분이 외로움을 성공적으로 극복하려면 여러분이 왜 외로운지를 알아야 합니다. 일단 외로움의 존재나 효과를 부정해서는 안됩니다. 외로움의 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외로움은 우리 문화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한 유명한 통신사가 “손을 뻗어 누군가를 만지십시오” 라는 광고를 내보냈습니다. 나는 오래 전에 이 맥주 광고를 보고 사람들이 결코 혼자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왜 사람들이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술을 마십니까? 과거에 낯선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900이라는 전화 번호도 있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사회 곳곳을 돌아다니며 외로움을 치료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무엇인가를 찾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여름 날 저녁에 천둥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는 동안 어머니는 그녀의 어린 아이를 침대에 재우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 밤에 나랑 잘 수 있어?”

엄마는 따스한 미소를 지으며 아이를 꼭 끌어안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건 안돼 난 네 아빠와 자야 해.”

아이가 그녀를 올려보며 떨리는 작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큰 애기가 그렇게 나보다 좋아?”

여러분이 이제 외로움을 다루기 위해 분명히 외로운 이유를 확인하십시오. 아시는 대로, 외로움의 종류는 무척 다양합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제프리 영 박사는 일시적, 상황적, 만성적 외로움에 대해 설명합니다.

1) “일시적인 transient 외로움”은 몇 분에서 몇 시간까지 지속되며, 주기적으로 거의 모든 사람들을 찾아갑니다.

2) 어떤 뜻밖의 사건으로 인한 “상황적 situational 외로움”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사망하거나, 가장 친한 친구가 갑자기 죽거나, 자녀가 먼 곳으로 떠나는 것 등입니다.

3) 그러나 최악의 외로움은 “만성적 chronic 외로움”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외로움을 결정 짓는 어떤 문제에 정신을 빼앗기는 경우입니다. 제프리 영 박사는 외상을 겪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만성적 외로움”은 한 번에 2 년 이상의 외로움을 느끼는 경우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고독을 선택함으로 외롭게 삽니다. 우리는 그들을 “외로운 자” 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늘 혼자입니다. 그들 스스로 외로움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솔직이 말하자면,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외롭습니다. 그들은 자기 중심적이며, 모든 문제에 독단적입니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사랑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작가 피터 드러커는 미국에서 가장 힘든 4 가지 직업을 다음과 같이 열거했습니다.

1) 미국 대통령, 2) 주요 대학 총장, 3) 대형 병원의 경영자, 4) 큰 교회의 담임 목사

왜 그런지 살펴보았더니, 그는 이 모든 직책들이 갖는 공통점이 외로움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이 모든 외로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죄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께 죄를 지은 후에 에덴 동산에서 느낀 최초의 감정이 외로움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것을 알고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외로움을 숨기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만이 자신의 외로움을 치료하실 수 있다는 것을 깨달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여기 있습니다” 라며 자신의 현존을 그분에게 알렸습니다.

  1. 외로움을 물리치는 방법.

외로움은 사람들이 모든 방법을 동원해서 무언가로 가득 채우려는 영혼의 공허와 공백입니다.

어느 한 남성이 정신과 의사를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두 인격을 가질 수 있죠?”

놀란 의사가 “왜 이중인격자가 되려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이중인격자가 되어서라도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그러나 여러분은 외로움을 이겨내려고 여러분 스스로를 분열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 대신 다른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1) 우선, 구세주께 다가가십시오. 예수님은 여러분의 외로움을 알고 계십니다.

시편 102 편은 메시아 시편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 관한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외로우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까지 살아온 다른 어떤 사람도 진정한 외로움을 겪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요한복음 1:11)

이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은 자신의 가족에게서 거절당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족들은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구들로부터 거부당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자란 곳에서 사람들은 그의 말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추종자들에게서 거절당했습니다.

그들은 그가 세상이 왕으로 오신 이로 알고 종려나무를 뿌리며 호산나를 외치며 그를 환호했지만, 예수님의 지상의 왕이 되려는 분이 아닌 것을 깨닫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스승이 가장 필요로 하는 시간에 그를 버렸습니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 순간 예수 그리스도는 앞으로 영원히 살게 될 외로운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외로움을 다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는 자신이 홀로 버려질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버려지는 외로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보아라, 너희가 나를 혼자 버려 두고 제각기 자기 집으로 흩어져 갈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벌써 왔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니, 나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복음 16:32)

여러분이 오늘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라면 여러분도 이 외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이 혼자라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은 외로울 틈이 없습니다.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히브리서 13:5)

여러분은 아들 하나님과 끊임없는 교제를 즐깁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태복음 28:20)

우리는 성령 하나님의 현존하심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셔서,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14:16)

이제 여러분은 외로움을 퇴치할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구세주께 다가가십시오.

2) 고통 당하는 자를 향해 손을 내미십시오.

여러분이 외롭다면 더 외로운 사람을 찾으십시오.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주십시오. 그들에게 축복이 되어주십시오. 여러분의 외로움을 잊고 외로움을 치료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외로운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외로움 앞에서 뒷걸음질 치면 우리는 컴컴한 지옥 같은 삶으로 삶을 끝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맞선다면, 우리와 같은 사람 수 백만, 수 천 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 스스로의 연민에 빠지지 않고 누군가를 위로하기 위해 손을 뻗으면, 그 때 우리는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가장 두려워해야 할 외로움은 주 예수 그리스도 없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그것을 두려워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면 여러분은 결코 다시 혼자 버려지지 않을 것입니다.

백동인 목사 ㅣ갈보리장로교회 담임 (503)856-4233

교회 주소: 8060 SW Brentwood St, Portland, OR 97225 / 주일예배: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