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많은 정보를 얻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와 대화할 때 말보다는 그의 표정과 손짓과 무의식의 행동 가운데 더 많은 정보를 얻습니다. 말로 얻는 정보가 30%라면 표정과 제스처에서 얻는 정보는 70%나 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보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하는 제스처를 더 신뢰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신앙이 좋은 사람, 주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을 그의 웃는 얼굴, 빛나는 얼굴에서 발견합니다. 바울은 오늘 로마서 12:11 (RSV)에서 “깃발처럼 늘어져 있지 말고 성령으로 빛나서 주를 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에서 우리가 빛나는 얼굴을 얻는 방법을 말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얼굴이 빛나게 하는 공식입니다.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1. 소망 중에 즐거워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외적인 특징은 기쁨입니다. 마태복음의 산상설교에서 8복은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바로 그 “복 있는 사람”이 ‘blessed’인데 그것의 원래 헬라어 (마카리오스)의 의미는 영어로”happy”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의미가 훨씬 더 깊습니다. 사실 행복은 우리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달려 있습니다. 일이 잘 풀릴 때, 운이 좋으면 행복해집니다. 하지만 기쁨은 이 일시적인 상태를 훨씬 뛰어 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변화, 갈등, 소란, 상실과 혼란 속에서 발견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 주시는 기쁨으로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기쁨은 소망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소망은 오늘과 내일이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확신이며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외적인 상황에 관계없이 내적인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매일 아침 일어나기 전에 잠시 침대에 누운 채로 그가 자신의 삶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을 헤아렸다고 썼습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에게 이렇게 얘기했다는 것입니다. “글쎄요, 오늘 멋진 소식이 있습니다. 저는 살아 있습니다. 그건 진짜 좋은 소식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친구도 있습니다.”

우리가 삶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때, 우리 삶의 모든 부정적인 영향에서 벗어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삶이 모두 나쁠 수는 없습니다. 좋은 것들을 기억하는 것은 우리에게 감정적으로나, 육체적 영적으로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중환자에게 그의 상태가 절망적이며 곧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고 말해 보십시오. 그는 며칠을 버티기가 힘들 것입니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에게 아무도 그를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해보십시오. 그의 삶은 산산조각이 난 좀비처럼 끝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희망이 있다고 말하면 기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죽음에 다가선 사람일지라도 치료될 수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사람들이 사랑을 찾을 것입니다. 희망은 언제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과 함께 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당신의 희망을 기뻐하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이것을 강조합니다.

2. “환난 중에 참으며”

어느 도시의 차량이 혼잡한 교차로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그 앞에 줄 서있던 많은 차들이 엑셀을 밝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당연히 가야 할 가장 앞 차의 문이 열리더니 한 남자가 내려 차의 보닛을 여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뒤차의 운전차가 그를 향해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정지된 차량의 운전자가 계속해서 차량의 문제를 찾지 못하고 있는데도 경적 소리가 계속되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뒤 차에 다가가 이렇게 말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내 차를 고칠 수 있다면 내가 기쁨으로 당신에게 경적을 울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의 기도는 “주님, 지금 당장 주십시오.”입니다. 그때 우리 얼굴에는 빛이 사라집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에 경적이 울리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앞으로 AC (After Corona)와 BC (Before Corona)로 분명히 나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감염학자들은 우리가 다시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인류는 역사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걷게 될 것입니다. 원인이 무엇 때문입니까?

바울은 로마서 19:22에서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라고 말합니다. 인류 전체가 지금까지 위기를 느낀 것은 1,2차 세계대전과 경제대공황 같은 군사와 경제 분야에서 발생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단 한 번도 적이라고 느끼지 않았던 자연의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엄청난 규모의 산불과, 홍수와 태풍과, 특별히 이번의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격을 보십시오. 이것은 사실 그동안 신학과 과학에서 끊임없이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자연을 건강하게 보존해야 한다고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하거나 무시했고 이제 자연의 반격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 따르면,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자연은 계속 무력하고 훼손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보니 리더십을 보이는 나라가 없습니다. 미국과 중국은 너무 무력했고, UN이나 WHO 같은 국제기구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도 그 동안 잘 하는 듯했는데 지금 위기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예언합니다. “(자연이)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롬8:21-22) 자연만 탓하면 문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 (자연 만이 아니라 우리)가 죄로부터 자유로워질 때까지 우리 역시 무력하고 훼손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이번 코로나 위기를 겪으며 많은 분들에게 가족 문제, 정서적 문제, 신체적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기도했고, 울었고, 누군가에게 도움을 간청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는데 어려움을 겪지만 그러나 우리가 가진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아침 어린 소녀가 부엌으로 달려가 무뚝뚝한 표정의 어머니 품에 안깁니다. 소녀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행복하지 않은 것 같아!” 엄마가 딸을 꼭 끌어안습니다. “아니야, 난 확실히 행복해!” “아닌 것 같아! 엄마 얼굴이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걸….”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하다면 그 감정을 얼굴로 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행복을 얼굴의 빛으로 나타내기 위해 따라야 할 공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간단합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백동인목사ㅣ갈보리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