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셋째 주일을 맞아 저는 기독교 신앙이 마주하는 가장 어려운 문제에 대해 독자 여러분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가장 큰 장애물 중 하나입니다.

미국 갤럽 여론조사 창시자 조지 갤럽에 비견되는 조지 바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단 한 가지 질문을 허락하신다면 여러분은 무엇에 대해 질문하시겠습니까?” 라는 주제로 전국 규모의 여론조사를 실행했습니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왜 세상에 고난과 고통이 존재하는가?”

이 세상에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세 가지 기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질병, 슬픔, 고난입니다. 여러분은 일시적으로 이 가운데 한 가지 혹은 두가지로부터 탈출할 수 있지만, 세 가지 모두를 한꺼번에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2 장 7-10 절에서 바울은 그에게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문제를 언급하면서 “이같이 그리스도인이 상처를 입을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신 것입니까?” 라고 묻습니다.

1.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고통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에게는 아픈 상처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극심한 고통에 대해서 14년 간이나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까지 아무도 이 문제에 대해 알지 못했습니다.

대체 14년간이나 그가 받았던 고통이 무엇이겠습니까? 14 년간이나 그를 지독하게 괴롭힌 그 고통,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지금까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바울이 상처를 받았고 심하게 앓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도 본 적이 없는 것을 바울이 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사람도 가늠할 수 없는 높이로 그를 데리고 올라가셨습니다. 그 특별한 체험은 바울이 대단한 자랑거리로 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받은 여러 가지 엄청난 계시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내가 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몸에 가시를 주셨다.” (고린도 후서 12: 7)

“육체의 가시”라는 표현이 있는 이 구절은 모든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입니다. 이 가시가 무엇인지에 대해 큰 논란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의 시력이 좋지 않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언어 장애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간질병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관절염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가시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 없습니다.

나는 바울이 정확한 병명을 밝히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이 가시의 정체를 비밀에 붙이도록 시키셨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문제가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나는 시력이 좋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고 말하고 말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와 “자랑”을 두려워했습니다. 사실, 우리에게 자랑스럽고 좋은 일이 많이 생길 때 우리는 유혹과 시험 앞에 서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무 위대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실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직면한 가장 큰 유혹 중 하나는 우리가 영적 진보 대신에 세상에서 너무 큰 것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축복과 짐의 균형을 잡아 주십니다.

2. 바울은 또한 고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이것이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이나 주님께 간구하였다.” (고린도 후서 12: 8)

여러분은 하나님께 여러분의 병을 고쳐 달라고, 여러분의 슬픔과 고통을 덜어 달라고 매달려 간구한 적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이 여러분의 기도에 침묵하셨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여러분은 기도 클럽에 가입하십시오. 바울은 세 번이나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세 차례의 40일 금식 기도였을 것입니다. 그는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간구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이 원하는 방식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었고 그가 하나님께 잘못된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바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거나, 하나님께서 관심을 두지 않으셨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기도의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명료하게 그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문제를 뺄셈으로 다루기를 원했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문제를 덧셈으로 처리하셨습니다.

여러분은, 9절의 이 교훈을 놓치지 마십시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에서 완전하게 된다!”

여러분은, 바울이 기도를 멈추기까지 그가 찾고 있던 대답을 얻지 못했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려는 지” 그분에게 알려드리느라 너무 바쁩니다. 이제 여러분의 고난에 관한 여러분의 이야기를 여기서 멈추고, 이제부터 진정으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시작할 때입니다.

바울이 고난을 겪는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이전에 한번도 배운 적이 없었던 것을 바울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산 정상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장 낮은 계곡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3.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 숙명적인 고통을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항, 분개,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면 마침내 우울증과 절망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기도와 인내, 신앙과 신뢰로 이어진다면 우리를 성숙과 승리로 인도할 것입니다.

고난을 겪고 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충분했다” 고 고백합니다. 신앙의 힘은 우리의 약함에서 나옵니다. 바울은 신의 장애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그 선물을 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것은 바울의 약점을 감추려는 그리스도의 힘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보폭을 조절합니다. 너무 앞으로 기울지 않았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14년은 나쁜 휴식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약할 때 강해지는 불굴의 승리자로 변모해 있었습니다. 바울이 약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의 힘을 보여줄 기회를 얻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천년 전에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큰 고난과 고통을 겪으심으로, 그것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영원한 고난과 고통을 걱정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올 삶에서도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백동인 목사 ㅣ갈보리장로교회 담임 (503)856-4233

교회 주소: 8060 SW Brentwood St, Portland, OR 97225 / 주일예배: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