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사람들이 두 가지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꾸려가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큰 아들은 사회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적합한 인물이 되려는 길을 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가족, 그리고 자신의 믿음을 위한 분명한 자기 계발의 프로그램을 추구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아들은 달랐습니다. 그는 향락을 추구했습니다. 성인이 되기 무섭게 작은 아들은 자기가 받을 유산을 조기에 집행해 줄 것을 아버지에게 요구합니다. 아버지는 이 자식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지 다 알면서도 자식에게 속아줍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강탈한 유산으로 향락과 도박과 마약에 빠집니다. 그의 인생은 커브 길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며 달려 내려갑니다. 그러나 그 향락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의 수중의 돈이 떨어지며 그는 막다른 골목에서 갇힌 인생이 됩니다.

그에게 궁극적인 위기가 왔습니다. 그는 대단히 궁핍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파트타임 자리 하나 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거처가 명확하지 않았고, 오랫동안 목욕 한 번 못한 모습에 사람들이 기겁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지방에 사는 어떤 사람을 찾아가서, 몸을 의탁하였습니다. 그 사람은 몰골이 쇠할 대로 쇠한 그를 측은히 여겨 사람들이 꺼리는 들로 나가 돼지를 치는 일을 소개하였습니다. 그는 도시에서 태어나 한번도 도심을 벗어나보지 못한 도시의 화려한 밤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돼지 치는 일로 종일 씨름합니다. 누구의 의지로 그가 이 들녘의 돼지우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의 인생역정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굶어 죽는 것은 사람이 겪는 일 가운데 가장 비참한 비극입니다. 이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는 평범한 일용직 노동자보다 훨씬 낮은 수준에서 기아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이 젊은 건달은 그제서야 제정신이 들어서, 스스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버지의 그 많은 품꾼들에게는 먹을 것이 남아도는데, 나는 여기에서 굶어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에게 돌아가서 …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 나를 품꾼의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

마찬가지로 이 글을 읽고 있는 저와 여러분도 흐르는 시간을 역류해서 영광과 명성이 자자했던 옛적 젊은 시절의 꿈으로, 어린 시절의 집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초등학교 시절 학교 친구들과 함께 어울렸던 고무줄 놀이, 공기 놀이, 땅 따먹기, 종이 학 접기 등의 신나는 놀이 동산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학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습니다. 과거는 기억 안에서 깊은 울림을 만들어낼 뿐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합니다.

독일이 철학자 니체는 영원 회귀를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이 지상의 대지 위에서 추구하는 현재의 모든 찰나적 삶은 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영원한 가치로 힘차게 긍정되어 간다고 했습니다. 이 영원 회귀에 우리의 삶에 대한 진실이 숨어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높이, 얼마나 멀리 나가 있는지에 관계없이 집으로 돌아올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죄 짖고 평생 숨어살 수 있습니다. 보기 싫은 사람을 피해 은밀한 곳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혐오하고 싫어하고 기피하고 싶은 것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검은 옷을 걸치고 얼굴의 표정도 감춘 채 죽음을 집행하는 죽음의 사자! 그는 우리가 어디에 숨어있는지에 관계없이, 우리의 마지막으로 결정된 시간에 가차없이 나타나 즉시 사망 권세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숨을 곳이 전혀 없는 정말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둘째 아들은 이 죽음 같은 절망감을 느낍니다. 드디어 그에게 깨달음이 왔습니다. 컴컴한 절망의 지하감옥에서 한 줄기 빛을 보았습니다. 그는 몽롱한 가운데 빛을 붙잡습니다. 그는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납니다. 그리고 천근만근 무거운 발걸음을 집을 향해 돌립니다. 힘겨운 걸음입니다. 아버지와 가족을 볼 낯이 없습니다. 두렵습니다. 그러나 굶어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에 용기를 내어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그가 집에 도달하기까지 아직도 먼 거리가 남았는데, 저 먼 발치에서 그의 아버지가 그를 알아보고 달려오기 시작합니다. 아버지는 단숨에 아들에게 달려들어 건달 아들의 목을 와락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할 말을 잃은 채 한동안 눈물만 흘립니다. 그리고 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누가복음 15:21-24을 보십시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녀 하나가 구원의 집으로 돌아올 때 긴장한 아버지의 사랑을 이렇게 전합니다. “가장 좋은 옷을 가져와 입히고, 손에 재산의 상속자임을 과시하는 반지를 끼우고, 주인의 아들들 만이 싣는 신발을 신기고, 최고의 잔칫상에 올릴 살진 송아지를 잡아 큰 잔치를 열자. 다른 생각은 말자!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들은 돌아온 건달 아들을 축하하기 위해 잔치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 큰 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왔습니다. 종을 통해서 자세한 소식을 듣게 된 큰 아들은 크게 분노했습니다. 오늘 날에도 그 어떤 이유인지 형제, 자매, 어머니, 아버지, 아들이나 딸의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절하는 가족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좀처럼 감동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은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한 사람에 대한 축복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들어냅니다. 이것이 전형적으로 돈과 상속에 얽혀 갈기갈기 마음이 찢어져 있는 가족의 모습입니다. 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나요?

우리는 본문의 아버지처럼 나가서 초대하거나 가족 간의 불화 때문에 축제를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그 어떤 이유로든 상처, 비관, 고집으로 죽었다 살아난 아들을 위한 잔치를 멈추게 하지 마십시오. 큰 아들은 자격이 없습니다. 그는 상속이 가능한 자격자일 뿐 아직 상속자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파티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기쁨을 나누어야 합니다. 축하를 계속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죄와 슬픔이 더 이상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지 말게 하십시오. 사랑과 정의가 우선입니다 굶주림은 그쳐야 합니다. 악인은 영원한 형벌로 구분됩니다. 끝까지 건달 아들을 거절하는 큰 아들의 갇힌 성실성은 교정되어야 합니다. 누구도 Coming Home의 기쁨을 제지할 수 없습니다. 마침내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회개한 죄인 하나가 회개가 필요 없는 의인 아흔 아홉 보다 하늘에서는 더 기쁨이 된다고 말이지요.

이제 여러분은 이 한 사람을 위한 파티를 조용히 계획해 보시면 어떨까요! 누구의 방해도 아랑곳하지 않는 하늘 아버지의 마음으로 집을 나간 가족을 위한 파티를 준비하십시오! 그것은 사실 여러분을 위한 파티입니다. 여러분은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잃었다가 찾은 아들(딸)입니다. 인간 존재로서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영원회귀의 Coming Home을 이루신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백동인 목사 ㅣ(503)856-4233

갈보리장로교회: 8060 SW Brentwood St, Portland, OR 97225 / 주일예배: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