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산이 지켜보는 평화로운 하루

일주일 내내 이어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치고, 주말 아침 하늘은 맑고 화창했습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우리는 곧바로 산행에 나섰습니다. 모처럼 찾아온 청명한 날씨, 운전대 너머로 비치는 햇살이 마치 “잘 다녀오라”고 응원해 주는 듯했죠. 산으로 향하는 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저는 어느새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습니다.

오늘의 목적지는 엘크 메도우(Elk Meadow). 과연 어떤 풍경이 우릴 반겨줄지 기대와 설렘 속에 가속 페달을 밟았습니다. 운전 중, 눈 덮인 후드산(Mt. Hood)의 위용이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우리는 화이트 리버 주차장(White River Parking Lot)에 차를 세우고, 한참 동안 그 장관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뒤 첫 번째 전망대에 도착해 잠시 숨을 고릅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에 가슴이 탁 트입니다. 광활한 산악 지대 너머로 고요히 자리한 눈 덮인 후드산이 시선을 압도합니다. 순간, 머릿속에 수많은 수식어가 떠올랐습니다.

웅장하다. 위대하다. 산중의 , 왕의 , King of Mountains.”

어떤 하나의 표현만으로는 부족한, 모든 찬사가 모여야만 어울릴 법한 풍경이었습니다. 주변의 산들이 하나같이 낮고 평범하게 느껴지는 가운데, 우뚝 솟은 후드산은 단연 돋보이며, 마치 숲과 산들이 그를 위한 배경처럼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고도를 조금 더 높이자 등산로 주변에 눈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벌써 이곳엔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합니다. 오레곤에서는 보통 11월이면 고지대에 눈이 내립니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비가 내리는 동안, 이 고산지대는 기온이 낮아 비가 곧 눈으로 바뀌는 것이지요. 이 시기는 가을 버섯들의 막바지이기도 합니다.

노루궁뎅이 버섯

그때였습니다. 등산로 근처에서 노루궁뎅이 버섯 한 송이를 발견했습니다. 마치 산신령이 “여깄다, 하나 가져가라”고 알려준 듯한 기분. 이런 작은 발견이 산행의 묘미이자 즐거움입니다.

드디어 엘크 메도우에 도착했습니다. 초입에는 낡고 오래된 쉘터 하나가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는데, 많이 허물어져 있어 다소 쓸쓸한 인상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너른 초원과 주변을 에워싼 푸른 숲 덕분에 이곳은 참으로 평화롭고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숲 너머 남쪽으론 다시 한 번 하얗게 정좌한 후드산이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이곳을 지켜주는 수호신처럼 말이지요.

사슴이 뛰노는 풍경을 기대했지만, 오늘은 한 마리도 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다양한 새들이 우리 주변을 맴돌며 관심을 보였습니다. 가져온 음식을 나눠주며, 새들과 잠시 시간을 함께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산에 오를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합니다. 직장, 육아, 각자의 일상으로 인해 짧은 시간에 산을 오르고 금세 내려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다르게 산을 대합니다. 빠르게 걷기보다는 주변을 세심히 관찰하며, 멈춰 서서 풍경을 음미합니다. 그러다 보니 산행에 걸리는 시간은 더 길어지지만, 대신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후드산의 위엄을 마주했고, 초원의 평온함을 느꼈으며, 숲과 새들과 함께 의미 있는 하루를 보냈습니다. 자연과 호흡하며 걸었던 이 시간, 그 자체로 최선을 다한 하루이자, 기억에 남을 순간이었습니다.

글,사진: 산사랑 산악회 허관택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