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은 늘 즐겁습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언제나 순탄하게 다가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산을 오르며 예상치 못한 순간들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런 예기치 못한 일들을 ‘변수’라 부릅니다. 변수는 산행을 특별하게 만들고, 그 순간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산행의 맛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어느 능선을 걷다 돌풍을 만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소나기를 맞아 옷이 흠뻑 젖기도 하죠. 지난 6월엔 여름 산행 중 갑작스런 비를 만났습니다. ‘이내 그치겠지’ 싶어 그대로 걸었지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비는 눈으로 바뀌었고, 저는 한여름에 뜻밖의 추위에 떨었습니다. 이런 변수들을 지나고 나면, 비로소 ‘진짜 산행’을 한 기분이 듭니다.

오늘의 산행지는 오레곤의 Saddle Mountain. 도착하자마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습니다. 산에선 흔한 일이지만, 오늘의 안개는 좀 달랐습니다. 쉽게 걷히지 않았죠. 처음엔 마치 잠에서 덜 깬 몽유병자처럼 안개 속을 헤매듯 걷다 보니, 어느새 몸이 산에 익숙해져 속도도 붙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세찬 안개바람이 얼굴을 스치며 매섭게 몰아쳤습니다. 저는 옷을 여미며 웃으며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 안개 마사지 받고 있는 거 아냐?”
“얼굴이 촉촉해지는 것 같은데?”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썼습니다. 하지만 8부 능선에 이르자 바람은 더욱 거세졌고, 9부 능선에 가까워지며 비까지 더해졌습니다. 옷이 젖기 시작했죠. ‘이쯤이면 오늘 정상에서의 조망은 기대하지 말자’ 생각하며 마음을 비우고 안전산행에 집중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마지막 발걸음을 정상에 내딛는 순간 서쪽 하늘이 살짝 열렸습니다. 마치 하늘이 우리 노력을 알아보고 보상해주는 듯했죠. 잠깐 사이에 맑은 하늘과 햇살이 펼쳐졌고,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진 몇 장을 찍었습니다. 하지만 날씨는 다시 빠르게 흐려졌습니다.

“햇님도 오늘은 안개에 기가 눌린 건가?”
“오늘은 안개가 이겼네.”
그래도 좋았습니다. 그 짧은 순간이라도 산정에서 맑은 하늘을 만났다는 것이.

하산길에도 비는 간헐적으로 이어졌습니다. 큰 바위에 올라 사진을 찍던 중, 문득 ‘오늘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체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내가 외쳤습니다.

“저기 봐!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아!”

그 말을 듣자마자 저는 본능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고, 안개 속에서 알록달록한 옷차림의 세 여중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들이 토끼처럼 산길을 뛰어내려오는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그 장면은 흐릿한 안개와 소녀들의 가벼운 움직임이 어우러져, 정말 천사가 내려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아내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구나 싶었고, 저 역시 그 풍경에 잠시 넋을 잃었습니다.

산행을 무사히 마친 뒤, 하산하자마자 날씨는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습니다. 허탈함과 아쉬움이 교차했지만, 다시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마음을 추스르며 귀갓길에 올랐습니다. 다행히 일행 소유의 테슬라 전기차 덕에, 우리는 자율주행 기능으로 여유롭게 귀가할 수 있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산행 후 피곤한 몸으로 운전하느라 녹초가 되었겠지만, 이날은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다 스르르 잠이 들 정도로 편안했습니다.

“역시, 일론 머스크 대단해!”

집에 도착하자, 몸은 덜 피곤했고 마음엔 이상한 충만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요 며칠 새 오레곤의 날씨는 한층 포근해졌습니다. 더위도 한풀 꺾이고, 바야흐로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 저는 이 계절을 이렇게 해석하고 싶습니다.

“하늘은 높고, 우리 마음은 더 풍요로워져야 한다.”

바쁜 일상 속에서 잠시 시간을 내어 공원이나 강가를 산책해보는 건 어떨까요. 자연을 가까이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만으로도 삶은 훨씬 가벼워질 수 있습니다. 오레곤은 곧 우기로 접어듭니다. 비가 내릴 때마다 기온은 조금씩 떨어질 테니, 늦기 전에 가을 나들이를 계획해보는 것도 정신 건강에 좋은 선택일 겁니다.

오레곤 저널을 사랑해 주시는 모든 분들, 건행하시길 바랍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글,사진 산사랑 산악회 회장 허관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