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10:34–43

사도행전 10장은 무덤의 이야기가 아니라 말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은 기적을 묘사하는 장면이 아니라, 베드로가 입을 열어 증언하는 자리입니다. 부활은 먼저 눈으로 확인하는 사건이 아니라, 입으로 선포되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은 침묵 속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사람을 세워 말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은 개인의 체험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를 향한 메시지가 됩니다. 또한 이 장면이 펼쳐지는 장소가 중요합니다. 예루살렘이 아닙니다. 회당도 아닙니다. 가이사랴에 있는 이방 군인의 집입니다.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미 성전의 경계를 넘어 일하고 계십니다. 이 본문은 단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부활이 일어난 이후 하나님께서 사람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새롭게 정리하시는지를 분명히 보여 줍니다.

1.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니다 ( 10:34–35)

베드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이 문장은 교리 진술이 아닙니다. 베드로 자신의 신학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진 자리에서 나온 고백입니다. “외모”(πρόσωπον, 프로소폰)는 얼굴을 뜻하지만, 성경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종교적 경계를 포함합니다. 베드로는 이제 하나님이 유대인의 경건함이라는 틀 안에서만 일하신다는 생각을 버립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제입니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다”는 표현은 완료형 인식입니다. 이미 하나님이 그렇게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아차렸다는 뜻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바꾸었습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외모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부활 사건 이후에야 베드로는 그것을 말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부활은 교리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인식을 해방시킵니다.

2.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 10:36–39)

베드로는 복음을 전하면서 이 문장을 반드시 말합니다. “그들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복음은 이 지점을 건너뛰지 않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부활을 위한 배경 설명이 아니라, 반드시 직면해야 할 사건입니다. 여기서 “나무”(ξύλον, 크실론)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표현이지만, 동시에 율법이 말하는 저주의 자리입니다(신 21:23). 베드로는 예수의 죽음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죽음처럼 보였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것은 주어입니다. “그들이 죽였다.”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정치 권력과 종교 권위, 그리고 군중의 동의가 함께 작동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사고가 아니었습니다. 오해도 아니었습니다. 분명한 선택의 결과였습니다. 베드로는 십자가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죄와 책임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자리입니다.

성경은 부활을 강조하기 위해 죽음을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죽음을 충분히 말합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직함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을 덮어 두고 구원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폭력을 그대로 드러내시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시작하십니다. 그래서 부활은 죽음을 무시한 사건이 아니라, 죽음을 분명히 통과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멈춰 서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서 서둘러 결론을 내리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고, 동시에 하나님이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하시는지를 기다려야 합니다. 베드로의 증언은 바로 그 지점에 우리를 세워 둡니다.

3. 하나님이 그를 살리사 ( 10:40–41)

그리고 주어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그를 살리사.” 여기서 “살리다”(ἤγειρεν, 에게이렌)는 단회적 과거형이지만, 그 결과는 현재에 열려 있습니다. 헬라어 문법상 이 동사는 결정적 행위를 가리키되, 그 효력은 지속됩니다. 부활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효력은 현재형입니다.

예수는 아무에게나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미리 택하신 증인”에게 보이셨습니다. 그 증인의 기준은 능력이 아닙니다. “함께 먹고 마신 자들”입니다. 부활은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관계의 연속입니다. 죽음이 관계를 끊지 못했다는 것이 부활의 핵심 증거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예수를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죄 사함”을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긴장입니다. 심판의 언어가 먼저 나오지만, 목적지는 정죄가 아니라 용서입니다. 부활은 공포를 강화하지 않습니다. 책임을 회복시키되, 길을 닫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의 증언은 올해의 한국교회와 미주 한인 공동체를 향해서도 분명한 방향을 제시합니다. 한국교회는 한 덩어리가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복음을 삶으로 증언해 왔고, 또 어떤 자리에서는 상처와 피로 속에서 말이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느 쪽이 더 많으냐가 아닙니다. 사도행전 10장이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스스로를 방어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담담히 증언하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올해 한국교회는 다시 증언의 단순함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판단을 멈추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먼저 말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입장’보다 ‘주님의 행하심’을 앞세우라는 뜻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그랬습니다. 그는 설명으로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예수께 행하신 일을 말했습니다. 그 말이 경계를 넘어갔고, 그 말이 한 집을 살렸습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민의 삶은 늘 경계 위에 서게 합니다. 언어와 제도, 문화와 신분의 경계 속에서 많은 이들이 하루를 ‘해명’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해명하는 사람으로 부르지 않으십니다. 증언하는 사람으로 부르십니다. 아직 모든 문제가 풀리지 않았어도, 길이 완전히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일하셨다는 사실을 말하게 하십니다. 그 증언이 두려움을 밀어내고, 공동체의 걸음을 다시 앞으로 움직이게 합니다.

백동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