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거리가 많은 아테네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자동차로 한시간 거리(아테네 서쪽 87km)에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입니다. 그곳에는 고대 아가야 지방의 주도이자 강력한 도시국가였던 코린트(고린도)가 있습니다. 본토와 연결된 반도이지만 고린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리를 건너야 합니다.
수에즈, 파나마 운하와 더불어 세계 3대 운하로 불리우는 코린트 운하를 건너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운하를 만들려는 시도는 기원전 7세기부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사람은 1세기의 네로황제이고 중간에 공사가 중단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다가 1893년에야 비로소 완공되었습니다.
지금의 고린도는 두번의 큰 지진(521, 1858년)으로 도시 기능이 축소된 인구 3만의 작은 도시입니다.하지만 성경시대의 고린도는 항구를 통한 무역이 발달한 대도시였고 수 많은 신전들(아폴론신전, 옥타비안신전, 아프로디테신전 등)이 있었던 종교도시로 각처에서 찾아오는 순례객들로 넘쳤었습니다.
특히 도시 중앙에는 시지프스 신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아크로코린트 산이 있는데 이곳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서는 1천여명의 여사제들이 참배객들과 음란한 종교적 제의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발을 내딛은 것은 2차 전도여행때(AD 50-53)의 일이었고 이곳에서 1년 6개월(18개월)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때까지의 선교여행중 가장 오래 머물면서 처음으로 목회를 했던 곳입니다. 이때 형성된 신앙공동체의 모습은 훗날 그가 기록한 고린도전서와 후서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고린도에서의 그의 선교사역은 어땠을까요? 수사학과 건축학이 발달한 풍요로운 도시인데다가 무역과 향락산업 그리고 신화속의 인물들을 섬기는 각종 신전들이 많았던 도시였기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고린도인답다”는 말은 “말만 잘한다” 또는 “바람둥이다”는 의미였다고 하니 고린도가 얼마나 향락적인 도시였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바울 스스로도 많은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명감이 그를 북돋아주었고 기대이상의 열매들이 보람을 느끼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고소를 당해 갈리오 총독앞 법정에 끌려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유대교 회당장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유적지에는 법정이자 그가 복음을 전했을 연단의 터(BEMA)가 남아있고 회당 터였음을 알려주는 메노라 주춧돌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어느 정도 교회의 기초를 세운 바울은 그를 파송한 안디옥교회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겐그레아라는 항구에서 배를 타기로 했는데 거기에서 출발 전 머리를 깎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특정 기간동안 머리를 깍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을 멀리하는 종교적 전통을 지키는 경우가 있었는데 바울은 2차 전도기간을 그와 같은 마음으로 헌신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의 겐그레아는 항구기능이 사라져서 한적한 시골 바닷가와 다르지 않습니다. 게다가 얼마전 관광객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있어서 차량에서의 하차가 엄격하게 통제되어 우리는 차 안에서 바닷가를 조망하기만 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를 3차 전도여행때 다시 들르게 되는데 그때 바울신학의 진수라고 알려진 로마서를 기록합니다.
고린도 다음으로 우리가 찾아간 곳은 그리이스에서 가장 인기있는 관광지 크레테 섬이었습니다(제주도의 4.5배크기).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구에서 야간 페리를 타고 이동하면 다음날 새벽 6시에 크레테섬 이라클리온항구에 도착합니다.
밤바다를 지나며 바울이 로마로 가는 도중 크레테 섬 근처에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칠흑같은 밤바다의 잔잔한 파도도 이렇게 무서운데 광풍을 만난 일엽편주속의 바울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생각하니 소름이 절로 돋습니다.
크레데섬은 미노스 문명의 발원지라고 알려져있습니다. BC 3천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크노소스 궁전터가 발견되어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과 비교되곤 합니다.신약 성경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이라클리온과 고르티나에 있는 디도(Titus) 기념 유적지입니다.바울은 AD60년경 처음 로마를 갈때 이 섬의 남서부 미항이라는 곳에 정박한 적이 있습니다.
그 후 로마에서의 2년 감금생활을 마치고 석방된 후에는 다시 이섬에 와서 복음을 전했고 그때 이 섬에 제자 디도를 남겨둡니다. 아마 당시의 주도(Capital city)였떤 고르티나였을 것입니다.
이곳에 6세기때 지어져 예배드리던 디도기념교회터가 있습니다 . 이라클레온 시내에도 디도기념교회가 있는데 입구를 들어서면 외쪽에 작은 내실이 있고 그곳에 디도의 유골이 안치된 유물보관대가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 출신이었던 그가 거칠고 거짓말잘하는 섬사람들 속에서 힘들게 목회를 하고 생애를 마감한 흔적이라 생각하니 사명자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제주도 선교에 헌신했던 이기풍목사님이 생각났습니다.
크레테 섬 전체는 올리브주산지로 산마다 온통 올리브나무로 가득합니다. 품질좋은 크레데산 올리브유를 사거나 이곳 출신 가수 나나 무수크리의 노래를 들어보고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소를 들러보는 것도 크레데 순례객들이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 목적지인 로마를 향해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