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유월절이 가까워질수록 예루살렘 언덕, 골고다의 그림자는 하루씩 길어졌습니다. 그 어둠을 가르는 한 문장, “다 이루었다.” 공기 속에 아직도 잔향처럼 떠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 소리로 되돌아갑니다. 철학, 헛된 속임수(골 2:8)에 끌려가던 마음들을 붙잡아 세우며 말합니다. 이미 끝났다, 이미 찢겼다.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던 법조문으로 쓴 증서(χειρόγραφον 케이로그라폰), 그건 지워졌고 십자가에 박혔다”(2:14). 그 한 문장 안에서 인간의 네 갈증—용서, 사랑, 공동체, 그리고 살아도 되는 이유—가 동시에 숨을 쉬기 시작합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성경 속 장면들로 밀어 넣습니다. 그 필요들이 하나씩 응답받는 자리로.

우리는 죄를 설명할 단어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밧세바 사건 후 나단의 비유 앞에서 무너져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13)고 고백합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스랍의 거룩한 찬송을 듣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사 6:5)라며 무너집니다. 베드로는 세 번째 닭 울음 소리에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합니다(눅 22:62). 십자가 옆 강도는 숨이 다해 가는 순간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며 마지막 숨으로 매달립니다. 이들 모두의 절규 위로 주님은 같은 선언을 내리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바울은 이 사건을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너희를 사하시고(χαρίζομαι 카리조마이)… 함께 살리시고(συνεζωοποίησεν 쉬네조오포이센)”(골 2:13). 용서는 더 이상 인간의 자기변호가 아닙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증서, 이미 찢겨 나간 죄의 기록. 그 결과 하나님은 우리를 “흠 없고(ἄμωμος 아모모스) 책망할 것이 없게”(골 1:22) 세우십니다. 죄인의 자리에서 제사장의 자리로, 끊어진 곳에서 다시 곁으로.

사랑의 필요는 십자가 한복판에서 가장 선명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요한은 그 사랑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본 것”(요일 4:12)이라 부릅니다. 호세아가 음란한 아내 고멜을 끝내 다시 데려와 앉히는 장면(호 3:1–3), 돌아온 탕자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눅 15:20),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을 “내가 네게 장가들리니”(호 2:19)라고 다시 부르는 언약의 하나님. 십자가 위 예수는 마지막 순간에도 사랑의 동사를 멈추지 않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사랑은 감정의 축적이 아니라, 피 흘림과 맡김, 위탁과 용서의 연속으로 증명됩니다. 바울이 말한 모든 동사—사하시고, 살리시고—는 사랑의 인칭 변화입니다.

공동체의 필요는 성경 전체를 관통합니다. 바벨탑 이후 흩어진 사람들을 하나님은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부르며 다시 모으기 시작하셨습니다. 출애굽 밤, 문설주에 피를 바른 집들마다 한 공동체가 탄생했습니다. 광야에서 십계명은 혼자 믿으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내 소유가 되겠다”(출 19:5)라는 공동체 소환장이었습니다. 신약에 와서 십자가가 세워진 그날,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마 27:51), 막힌 담이 허물어집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엡 2:14). 오순절, 각 나라 말이 뒤섞여 하나의 복음을 고백하고(행 2:5–11),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행 2:42) 공동체가 숨 쉬기 시작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9절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몸이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받고 연합”(συμβιβαζόμενον 숨비바조메논)한다고 합니다. 십자가 주변의 땅은 평평합니다. 유대인도 헬라인도, 종도 자유인도(갈 3:28), 모두 같은 높이에서 서로를 본다. 속하지 못할까 불안하던 심장은, 십자가 발치에서 비로소 박동을 맞춥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살아가고 죽을 만한 이유를 찾습니다. 이사야는 숯불에 입술이 지져진 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 외칩니다. 예레미야는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다”(렘 1:5)라는 음성 앞에 떨다가 결국 불붙는 말씀을 참지 못합니다(렘 20:9). 베드로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나를 따르라”(마 4:19)를 넘어, 요한복음 마지막 장에서 “네가 늙어서는 남이 네게 띠 띠우고”(요 21:18)라는 십자가 길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바울은 다메섹 길 위에서 뒤집혀 “내가 주 예수의 복음을 위하여 갇힌 자”(엡 3:1)가 되고,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행 20:24)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습니다. 십자가는 그들에게 “불가능하니까 하지 말라”가 아니라 “이미 이겼으니 시작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ἀπεκδυσάμενος 아펙뒤사메노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θριαμβεύσας 트리아μβ레우사스)”(골 2:15). 승리 행렬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르며 남은 싸움의 조각들을 정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주변의 소음을 모두 끄고 십자가 앞에 서서 다음을 고백하십시오—예수께서 이미 “빚 문서”를 찢으셨으니(골 2:14) 나는 더 이상 죄의 채무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값없이 주신 사랑 때문에 오늘도 숨 쉬는 존재임을 인정하며(롬 5:8), 여러분은 혼자가 아니라 주님의 가족 ‘우리’ 안에 서 있음을 기억하고(엡 2:14–19), 악한 권세가 이미 벗겨지고 승리가 선포된 전쟁터에서(골 2:15) 이제 담대히 걸어가겠다고 결단하십시오—그리고 마지막 한마디, “성령님, 오늘 이 진리를 붙들고 살아내게 하소서!”라고 간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다시 들고 나갈 십자가 리듬입니다.


백동인(Reimagining Liberation 저자, Wipf and Stock Publish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