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이후 최근의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4명 중 3명은 정기적으로 기도합니다. 환자의 50%는 의사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뿐만 아니라 함께 기도해 주기를 원합니다. 기도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도를 하느냐 안 하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기도는 어떤 차이를 만드는가?”입니다. 기도는 힘인가, 위약인가? 기도는 희망적인 생각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개입인가? 기도는 사물을 변화시킬까요 아니면 우리를 변화시킬까요? 사순절에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엎드려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깊은 기도, 고뇌에 찬 기도, 삶과 죽음을 걸고 드린 기도입니다. 많은 분들이 기도의 자리에 있습니다. 여러분 중 일부도 오늘도 그곳에 있습니다. 기도로 무엇이 가능할까요? 예수님께서 기도 가운데, 가능한가를 묻는 질문을 던지셨다는 점이 흥미롭지 않나요? “내 아버지여,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렇다면 기도에서 무엇이 가능할까요?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우선, 관계가 가능합니다. 기도는 종교적 활동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영어성경에 나와있는 ‘오’는 긴급하다는 뜻입니다. “나의”는 개인적인 것을 말합니다. “아버지여”는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생의 이 짧은 고통의 순간에 “아버지여, 심각한 가족 문제를 의논하고 싶습니다. 잔이 너무 씁쓸해서 그냥 지나가고 싶어요. 얘기 좀 해요.” 라고 하십니다. 작가 스티브 하퍼는 기도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으로부터 무언가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라고 말합니다. 깊은 기도는 그것을 가능케 합니다. 기도는 여러분과 주님 사이에 깊고 생명력 있고 지속적인 친밀감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멀리서 지켜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제 속에 품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오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늘과 땅의 자원이 우리에게 제공되고, 하늘이 우리 앞에 열립니다. 최상의 결과를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우리는 상상하지 못했던 잠재력과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를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재력은 기도 안에 있습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자원을 활용할까요? 이것이 바로 기도의 가능성입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도로는 기대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기도는 마법이 아닙니다. 기도는 조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본질적으로 하실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를 기쁘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첫 번째 요청을 들어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내 아버지여, 이 일을 맡기겠나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에게 “미안하지만 그건 불가능하다”고 대답하십니다. “좀 더 노력해야겠구나.” 우리 대부분은 이 사실을 이해할 만큼 오래 살았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저서 <신에 대한 실망>에서 신학교 학생이었던 리처드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서두를 시작합니다. 대학 시절 기독교인이 된 리처드는 교회 모임에 자주 참석했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대한 간증을 많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리처드는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보살핌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를 소개해준 약혼녀가 그를 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의 부모님은 이혼했습니다. 장래의 고용주에게 사기를 당했습니다. 사실 리처드가 크리스천이었던 4년 동안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기만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신학교 기숙사 방에서 리처드와 하나님과의 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리처드는 “나는 당신이 세상을 어떻게 운영할지 알고 싶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당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리처드는 4시간 동안 기다린 후 자리에서 일어나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날 밤 그는 회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회심이 아니었습니다. 리처드는 신앙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저는 인생에서 리처드와 같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실망하고, 상처받고, 어떤 특별한 고통과 의심에 사로잡혀 신앙을 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 우리가 기도로는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습니다. 얀시는 이 일을 통해 평화의 기도를 배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수 있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는 기도의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번 “내 아버지여, 만일 이것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다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기도는 거기서 끝납니다.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숨겨져 있지 않습니다. 세상이 구원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중 하나도 멸망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공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여러분과 제가 가난한 사람들의 외침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신비가 아닙니다. 다만 그 뜻을 따르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우라 자신의 의지의 결단력이 부족할 뿐입니다.
상황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마침내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하나님의 은혜가 배제된 곳으로 인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이 모든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