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레곤의 우기, 그리고 비 속의 산행–
어느새 시월도 셋째 주. 오레곤은 본격적인 우기로 접어들었습니다. 매년 겪는 일이라 익숙하지만, 올해는 유독 다르게 다가옵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니면 아들의 중요한 대사를 앞둔 시기라서일까요? 요즘은 되도록 비 오는 날 외출을 자제하고 집에 머물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번 주 토요일, 종일 비 예보가 있습니다. 주말 산행은 어쩌죠?
그래도… 가야죠. 일주일에 한 번쯤은 꼭 바깥바람을 쐬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우리, 비를 무릅쓰고 산으로 향했습니다.
비가 내리는 파라다이스 파크 트레일. 우비를 입고 걷는 동안 주위는 깊은 적막에 잠겨 있었습니다. 젖은 숲,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고요한 빗소리. 그 속을 뚜벅뚜벅 걸으며 문득 젊은 시절의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중장비를 다루던 그는 비 오는 날이면 유난히 기분이 좋아져, “어이~ 칭구! 오늘 비 와서 현장일 취소야. 우리 한잔하자!” 하고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그 웃음기 어린 얼굴이 아직도 선합니다.
뉴욕에 사는 아들도 떠올랐습니다. “나는 빗소리 들으며 잠드는 게 제일 행복해.” 늘 그렇게 말하던 아이.
그렇게 비를 맞으며 숲길을 걷는 동안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지금 우리는 잘하고 있는가?’
그리고, ‘산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가?’
저에게 산은 체력을 단련하는 운동장이자,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도량입니다. 동시에 힐링의 공간이며, 동반자와 함께 걷는 동행의 길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버섯을 조금 채취했으니 식재료 공급처 역할도 했네요.

우리가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대답은 결국 우리의 산행 결과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오늘, 비 오는 날 무리하지 않고 건강하게 산을 다녀왔으니 저는 이렇게 평해 봅니다.
“나쁘지 않은 나들이였다.”
이번 주 초부터 비는 쉬지 않고 내렸습니다. 처음엔 가늘던 비가 점점 굵어지더니, 결국 장대비로 바뀌었고 주말엔 바람과 우박을 동반한 소낙비로 변했습니다. 해를 볼 틈도 없이 한 주가 흘러갔습니다.
토요 산행을 마치고 집에서 피로를 풀던 중, 갑자기 우박이 창문을 강하게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따다다다다…”
TV를 보다 말고 창가로 달려가 보니, 딱따구리 소리인 줄 알았던 그 소리는 바로 우박이었습니다.
산행을 일찍 끝내고 돌아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그날 밤, 강한 바람과 빗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동네 산책을 나섰습니다.
전날 밤의 거센 비바람이 동네의 나무들을 꽤나 괴롭혔겠지요. 조용히 살고 싶었던 나무들은 바람에게 한사코 애원했을 겁니다.
하지만 얄궂은 바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나뭇잎을 흩날렸습니다.
그래도!
그 거센 바람에도 견뎌낸 단풍은 오히려 더 붉게 물들어 있었습니다.
숙성된 단풍. 더 깊어진 가을의 색.
한편, 대다수 나뭇잎은 결국 땅에 떨어져 낙엽이 되었습니다.
시멘트 바닥에 착 달라붙은 잎들.
그러나 흩어지지 않고 함께 뭉쳐, 마치 붉은 카펫처럼 길을 수놓고 있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움을 주려 한 그 마음, 저는 높이 삽니다.
그 낙엽 위를 저는 천천히 걸었습니다.
한 걸음 앞으로, 한 걸음 뒤로.
쿠션감이 느껴지는 발바닥. 걸음이 가볍습니다.
좋다. 정말 좋다.
가을.단풍.낙엽.
그리고 비.
당신들이 있어, 올 가을이 더 빛납니다.
나는 이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그리고 기억하고 싶습니다.
우리의 가을을.
글,사진: 허관택
산사랑 산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