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희망으로 삽니다. 스스로를 설득하며, 내일을 그리며, 남아 있는 가능성을 계산합니다. 조건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붙들고, 길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으면 거기에 기대어 섭니다. 이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희망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하는 희망은 그 차원을 넘어섭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 여기에는 분명히 두 개의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는 상황입니다. 백 세의 몸, 사라의 태는 이미 닫혔고, 성경은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4:19)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감정적 과장이 아니라 객관적 진단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축소하지 않습니다. 믿음은 현실을 직면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바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파라 엘피다 에피 엘피디”라고 말합니다. ‘희망을 거슬러 희망 위에’라는 뜻입니다. 인간적 희망이 끝난 자리에서, 하나님의 약속 위에 다시 서는 희망입니다. 이 희망은 심리적 낙관이 아닙니다. 약속에 대한 신뢰입니다.
1. 그가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롬 4:3). 여기서 ‘여겨졌다’는 말은 헬라어 로기조마이입니다. 계산하다, 장부에 기록하다, 전가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감정의 변화가 아니라, 법적 선언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이 장부를 보시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를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삶이 완전해졌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의 믿음을 의로 ‘간주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의를 생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를 주십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얻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내려와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전히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로는 두려워했고, 때로는 거짓말도 했고, 때로는 기다림에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실패를 계산하지 않고, 그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다윗을 인용합니다.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은 복이 있고”(롬 4:7). 다윗은 누구입니까? 넘어졌던 사람입니다. 큰 죄를 지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말합니다. 복은 죄가 없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죄가 사함을 받았기 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복은 성취의 결과가 아닙니다. 복은 용서의 결과입니다.
2. 무할례 시에 믿었으니 (9–17)
“그가 할례시에냐 무할례시에냐 아니요 무할례시에니라”(롬 4:10). 바울은 감정을 말하지 않습니다. 순서를 따집니다. 시간의 질서를 묻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롭다 함을 받은 때가 언제입니까? 할례를 받기 전입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롭다 하신 시점은 종교적 표식을 갖추기 이전이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복음의 핵심입니다. 의는 제도의 결과가 아닙니다. 은혜는 의식의 보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의롭다 하시고, 그 다음에 표징을 주셨습니다. 할례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의 표지였습니다. 믿음은 제도보다 앞섭니다. 은혜는 형식보다 먼저입니다.
17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 여기 ‘부르신다’는 동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옛날에만 창조하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도 부르십니다. 지금도 생명을 일으키십니다. 지금도 존재하지 않는 것에 존재를 명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를 “많은 민족의 조상”이라 부르셨습니다. 현실은 부정하고 있었지만, 약속은 선포되었습니다. 이름은 먼저 주어졌고, 성취는 나중에 왔습니다. 믿음은 이 간극 위에 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은 눈에 보이는 조건을 근거로 서지 않습니다. 약속 위에 섭니다. 현실은 때로 하나님의 말씀을 반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실을 따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을 이끌어 가십니다.
3.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18–25)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4:19).m바울은 현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알고도’라는 표현은 냉정한 인식을 전제합니다. 믿음은 자기 암시가 아닙니다.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이 약해지지 아니하고”(4:19). 여기 ‘약해지다’는 수동태로, 외부 상황이 믿음을 약화시키지 못했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심리적 낙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입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4:21). ‘능히’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능력을 강조합니다. 아브라함의 초점은 자기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있었습니다. 25절은 복음의 정점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국 그리스도의 부활을 향합니다. 믿음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역사적 사건 위에 세워집니다. 드라마는 이렇게 완성됩니다. 인간의 불가능—하나님의 약속—그리스도의 성취.
삶의 한계 앞에 서면 인간의 계산은 멈춥니다. 경험도, 이성도, 통계도 더 이상 답을 주지 못합니다. 그때 비로소 드러납니다. 내가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왔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현실의 결론을 따라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말씀하신 대로 현실을 이끌어 가십니다. 여러분의 현실이 바랄 수 없는 자리처럼 보일지라도, 믿음은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약속을 붙드는 선택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은 그 약속의 절정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선언되던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역사를 바꾸는 능력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