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둑 풀잎이 새벽 바람에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합니다. 물빛은 도시의 잔불을 품고 잔잔히 흐르고, 멀리서 교각이 낮은 울림을 떨구며 기다립니다. 아직 전광판은 꺼진 채 잿빛 화면만 남겼고, 청소차의 브러시가 젖은 아스팔트를 훑습니다. 철골과 유리, 매연과 네온이 숨을 죽인 틈에 별 하나가 마지막 불씨처럼 희미하게 떠 있습니다. 그 불씨는 곧 사라질 줄 알면서도, 순간만큼은 거리의 모든 소음을 누르고 존재를 증명합니다.
그 고요 위로 낮고 단단한 기도문이 스며듭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숨은 크게 들이켜졌다가 이내 잦아듭니다. 사람에게서 뽑힌 빛과 소리가 멈추자, 도시 너머 더 깊은 숨결이 들립니다. 달과 별, 계절에 따라 높낮이가 변하는 강물, 아직 어둠과 빛 사이에 매달린 하늘—모두가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고 새벽은 말합니다. 작은 돌멩이만큼도 되지 않는 존재가 크나큰 이름 앞에서, 먼지 같은 생을 들고서, “사람이 무엇이관대”라는 질문을 꺼냅니다.
1. 인간은 우주의 중심이 아닙니다
시편 8편은 인간을 높이기 전에 먼저 낮춥니다. 밤하늘을 덮은 달과 별, 측량조차 어려운 우주를 바라보면 인간은 먼지와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시 8:4)라는 물음은 새벽 지하철 플랫폼에 줄지어 선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수백만 개 불빛이 깜빡여도 한 사람의 심장 소리는 도시 굉음에 묻힙니다.
‘작음’은 곧 ‘은혜의 조건’입니다.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면 하나님께 은혜를 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먼지 같은 존재가 돌봄을 받는다면 그 돌봄은 전적으로 일방적인 선물입니다. 인간의 의미는 자기 확장에서 나오지 않고, 창조주가 부여한 관계적 가치에서 비롯됩니다. 그래서 은혜는 “작기 때문에 더 빛난다”는 역설 위에서만 이해됩니다.
1960년대 말, 우주 궤도를 돌던 탐사선 승무원들은 지구를 24만 마일 밖에서 바라보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를 낭독했습니다. 그들에게 우주는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일깨우는 공간이었습니다. 아무리 미디어 전광판이 인간의 성취를 칭송해도, 새벽별 하나를 지우지 못합니다. 중심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2. 그러나 존귀로 관을 입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곧바로 또 다른 선언을 덧붙입니다. “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인간은 작지만 하찮지 않습니다. 새벽 오피스 빌딩 창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창백한 얼굴에 생기를 더하듯,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대체 불가능한 존귀를 입히셨습니다.
존귀는 ‘왕적 대리권’과 연결됩니다. 창조주께서는 피조 세계를 돌보는 통치자로 인간을 임명하셨습니다. 따라서 존귀는 출생지나 능력과 무관하게 선물로 주어집니다. 복음이 말하는 존귀는 “나는 귀하다”라는 자기 암시가 아니라 “크신 분이 나를 보배라 부르셨기에 귀하다”라는 선언입니다.
서울 변두리 원룸의 희미한 전등 아래에서도, 낙방 통지서를 든 취업 준비생의 심장은 존귀를 잃지 않습니다. 존귀는 하루 성과로 오르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씌우신 관은 흔들리는 감정 위에 세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사회는 가장 약한 이를 “이미 관을 쓴 자”로 대해야 합니다.
3. 맡겨진 집을 돌볼 책임이 있습니다
시편은 인간에게 권위만 주지 않고 임무를 부여합니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양과 소와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해로 다니는 것이니이다.”(시 8:6-8) 인간은 지구의 세입자이자 청지기입니다.
플라스틱 파편이 강물에 흘러가고, 과다 채굴로 산이 깎여 나가고, 빛 공해가 별빛을 삼켜 버리는 시대에 청지기직은 낡은 교리가 아닙니다. 비닐 사용을 줄이는 작은 실천도, 동물 복지를 위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도 모두 창조 회복의 일부입니다.
창세기 2장의 “땅을 경작하며 지키라”에서 ‘경작’은 생산성을, ‘지키라’는 보존성을 강조합니다. 복음은 둘 중 하나를 폐기하지 않습니다. 땅을 돌보는 책임은 은혜로 받은 왕적 권위의 실천적 측면입니다. 창조를 사랑하는 것은 인류애를 넘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4. 복음의 닻을 내려야 할 자리
낮은 자리, 그러나 존귀한 신분, 그리고 청지기적 책임―이 세 축은 복음 없이는 하나로 묶이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의 결말을 원점으로 돌려놓습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8:9) 인간 서사의 주어는 결국 하나님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자기계발 프로젝트를 완성해 주는 보조 바퀴가 아닙니다. 복음은 인간 중심 스토리를 하나님 중심 드라마로 전복합니다. 인간이 작음을 인정할 때, 존귀는 선물이 되고, 책임은 의무가 아니라 감사의 응답이 됩니다.
도시는 여전히 분주합니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은 끝없는 피드를 갱신하지만, 시편 8편은 오늘도 묻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관대?” 인간은 중심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에게 의미와 사명을 동시에 부여하셨습니다. 작은 자리에서 숨 쉬면서도 창조주를 기억하십시오. 맡겨진 땅을 살뜰히 보살피십시오. 별빛보다 작아 보여도 꺼지지 않을 존귀를 잊지 마십시오. 그때 비로소 시편 기자의 찬양이 현실이 됩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