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이자 교육자인 파커 J. 파머는, 언젠가 그가 타고 가려던 비행기가 예기치 않게 공항에서 긴 시간 이륙하지 못한 일을 글로 남겼습니다. 알고 보니 간이식을 나르는 트럭이 고장이 난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던 조종사는 간식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 출발 시간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곧 이륙했습니다.

​그들이 공중에 오르자 마자 승객들은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티켓은 계약이고 간식도 계약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남자가 일어나서 말했습니다. “저는 변호사입니다. 집단 소송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손을 들어 의사를 표시해주세요.” 승객들의 불평과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승무원이 규정에 따라 비행에 관한 친숙한 정보로 안내를 시작했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기장이 안전 벨트 조명을 껐습니다. 우리는 순항 고도 30,000 피트에 도달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녀는 매우 놀라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이 비행의 첫 번째 구간에서 받은 땅콩 봉지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것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그것을 소지하신 분들은 손을 들어주세요!” “네, 다섯개가 있군요. 그럼 그것을 열어 주변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저는 또한 여러분 가운데 민트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럼 그것을 찾아 저에게 넘겨주세요.”

​”신문이 있는 분들은 한 섹션 만 읽을 수 있습니다. 남은 섹션을 다른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넘겨주세요.” “여러분 중 일부는 부모 또는 조부모입니다. 자녀나 손자의 사진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세요.” 그녀는 짧은 안내로 그 비행기 내의 감정적인 분위기를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나중에 승무원이 파커 J. 파머의 좌석 근처에 왔을 때 그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이름을 가르쳐 주세요. 상관의 이름은 누구입니까? 표창장을 제안하려고 합니다. 오늘 제가 본 것은 그룹 리더십의 가장 좋은 예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5병2어는 여전히 가능한 것 같아요!”라고 답변했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예수께서 보리 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큰 무리를 먹이셨을 때 많은 학자들은 사람들이 그 적은 것을 서로 나눈 것은 역사적 사실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5병2어에 관한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라 광야로 나갔습니다.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군중이 굶주릴 것임을 아셨습니다. 제자들은 “무리를 헤쳐 보내어, 제각기 먹을 것을 사 먹게, 마을로 보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속으로 얼마나 놀랐을 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건 말도 안 돼!”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은데….”라고 불평했을 것입니다. 제자 가운데 빌립은 이렇게 군중을 먹이려면 반년의 임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의문의 여지가 없이 그것은 제자들이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제자인 안드레는 군중 속에서 한 어린 소년을 발견했습니다. 그 소년은 보리 떡 5 개와 물고기 2 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오해하지 마십시오. “보리 떡 다섯 개”는 빵 다섯 개를 먹는 것과는 다릅니다. 성경학자인 윌리암 바클레이에 따르면 “보리 떡”은 작은 샌드위치 롤처럼 작습니다.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작은 정어리로 마른 빵을 먹기위한 반찬이었습니다. 그 소년은 소풍을 가려 했고 군중에 휩쓸려 그곳까지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안드레는 소년에게 몹시 당황스러운 제안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소년에 몹시 부적절한 제안이었습니다.

​그러나 롤 5 개와 작은 물고기 2 마리가 주인의 손에 들렸을 때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다 배불리 먹었을 때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찰 정도로 남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주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다 먹이실 수 있었을까요?

​일부 학자들은 군중이 음식을 가져왔지만 이 작은 소년이 자신의 도시락을 나눠 주겠다고 제안할 때가지 숨겨 두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조금 전, 승무원이 언급한 원칙입니다. 나눌 때 사용 가능한 양이 배가된다는 것입니다.

​네 복음서 모두 이 기적을 언급하지만 버전은 약간씩 다릅니다. 마태와 마가는 그 일부 버전을 두 번 말합니다 (마 14: 13-21; 15: 32-39; 마가 6: 32-44; 8: 1-10; 누가 9: 10-17; 요한 6: 1-15). 이 사건이 실제로 있었다는 사실은 거의 부정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많은 사람들을 먹였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가 보리 떡 5 개와 작은 물고기 2 개로 어떻게 이 일을 했는지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훈입니다.

​1. 우선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보여줍니다.

​사실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마14:14)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고 구원하시려는 한 가지 목적과 열망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바라보았을 때 불쌍히 여기시고 우셨습니다. (눅19:41). 그는 인간의 상실, 근심, 배고픔을 아셨습니다. 그는 사람들에 대한 긍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곤경에 처한 무리를 보고 우셨습니다. 그는 우리가 의심하고, 거부당하고, 배신당하고, 몸이 망가진 것을 보고 우십니다. 그는 우리가 입은 상처를 잘 아십니다.

​세상에는 동정심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보다 불운한 사람들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려는 사람들이 없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긍휼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13 세기 신비주의자인 마이스터 에카르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가장 위대한 성품은 긍휼입니다.” 죄 많은 인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나사렛 예수보다 더 긍휼을 베푸신 분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입니다.

​2. 그리고 그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봐야 할 두 번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놓치는 지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에 대해 관심을 갖고 계시다고 믿지만, 그분이 우리를 도울 수 있다고 정말로 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쾌하지 않은 힘 없는 삶을 영위합니다. 하지만 능력이 없는 긍휼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분은 우리를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습니다!

​3. 그러나 한 가지 더 말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린 소년의 나눔에 주목하십시오.

​이 소년이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나누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의심할 여지없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 없이도 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눔과 참여가 그리스도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사역의 원리인 것은 분명합니

그것이 물고기와 빵일 수도 있고, 갈대상자에 숨겨져 있는 작은 아기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 일하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여러분과 저는 의학이 성취한 것을 누리는 놀라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다른 세대를 괴롭힌 수많은 질병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암, 심장 마비, 뇌졸중과 같은 질병의 사망률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더 오래 살고 있습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우리가 즐기는 치료법은 태초부터 자연에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데 왜 이제 혜택을 누리고 되었습니까? 모든 치유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괴롭히는 질병의 원인을 인간 스스로 꼼꼼히 연구하여 그것을 제거할 때까지 기다리셨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적인 치료법은 수백 년, 아마도 수천 년 전에 우리의 것이었을 수 있지만 인류는 그동안 하나님과 너무 멀어져 어둠 속에서 방황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악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탐욕, 욕망, 증오는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더 좋게 만들기 위해 의도하신 것들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삶은 인류가 하나님과 동행할 때 비로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학 분야 만이 아니라 삶의 모든 부분에서 사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후서 5:18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세상, 하나님이 의도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감을 주시고 우리는 땀을 흘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주시고 우리는 보리 떡과 작은 물고기를 드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필요에 대해 동정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함께 일할 무언가를 필요로 하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의 삶을 살펴보세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그러한 필요를 충족시키십니다. 하지만 먼저 그분의 손에 맡겨야 할 일이 있습니까? 상황을 돕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까? 주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그리스도에 긍휼하심이 있고 또한 그는 우리를 도울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필요로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에게 우리가 가진 작은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행하실 위대한 기적을 눈으로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백동인목사ㅣ갈보리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