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버스와 지하철 플랫폼마다 ‘불안’이라는 붉은 LED가 번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몫의 평화와 복을 마련해 두셨다고 조용히 선언하십니다. 광야와 우물가와 십자가가 바로 그 저장소입니다. 광야에서 “네가 그 반석을 치라… 물이 나오리니”(출 17:6)라는 약속이 있었습니다. 우물가에서는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라는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십자가에서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라는 완결 선언이 울려 퍼졌습니다.
신명기 28장은 복을 트로피가 아닌 초대장으로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בָּרוּךְ(바룩, 이미 부어진 복)이라는 완료 수동 분사는 ‘축복 모드’가 이미 켜져 있음을 말해 줍니다. 삶은 성과를 쌓아 올리는 경주가 아니라 활짝 열린 잔치 자리로 들어가는 여정입니다. 성읍과 들, 곧 지하철과 오피스, 논두렁과 골목길에도 바룩이라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초대장을 흔들며 자신이 이미 환영받은 사람임을 선언할 뿐입니다. 이 흐름이 끊이지 않음을 알려 주는 동사 יִהְיֶה(이흐예, ‘계속된다, ~될 것이다’)는 취업을 기다리는 청년이나 은퇴를 준비하는 어르신 모두를 하나님의 ‘계속된다’ 버튼 안에 머물게 합니다. “네가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신28:3),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신28:6)
출애굽기 17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보라, 내가 거기, 호렙 산 צוּר(추르, 반석) 위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וְהִכִּיתָ(베히키타)… 그곳에서 물 מַיִם(마임)이 나오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모세보다 먼저 광야 한복판에 서 계셨습니다. 인간의 순종은 은혜를 불러오는 열쇠가 아니라 이미 주둔한 임재를 증폭하는 마이크입니다. ‘치라(베히키타)’가 미완료형이기에 한 번의 타격이 멈추지 않는 흐름을 낳습니다. 어제 옥상에서 드린 짧은 기도도 오늘 내 영혼의 수도관에 압력을 더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반석은 그리스도”라고 해석합니다(고전 10:4).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께서는 ἔκκεντρίζω(엨켄트리조, 창으로 찌르다)를 당하셨고,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물과 피(요 19:34)가 광야의 마임보다 깊은 생수가 되어 우리에게 영원을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복은 도시계획도의 붉은 선처럼 성읍과 들을 잇습니다. 우리는 하늘에서 이미 거행된 착공식을 기억하며 완공식까지 그 선을 따라 걸으면 됩니다. 재택근무 화면 앞의 책상도 들판이며, 현관문 앞의 택배 상자와 가족 식탁도 들판입니다. 바룩(축복)의 압력은 그 모든 작은 들에 스며 있습니다. 불평과 비교, 그리고 영적인 소진은 공사를 일시 중단시키지만, 한 걸음씩 순종하는 우리의 발걸음은 “들어와도 복, 나가도 복”이라는 약속을 현실로 만듭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께서는 “내가 주는 물 ὕδωρ(휘도르,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ἁλλομένου(할로메누, 솟구치다) πηγή(페게, 샘)가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로메누(솟구치다)가 현재 분사인 것은 물줄기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우리 안에서 밖으로 솟구친다는 뜻입니다. 복음은 드론처럼 위에서 물통을 내려보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샘을 파십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 다섯’이라는 과거를 드러냈지만 예수께서는 정죄 대신 새 초대를 건네셨습니다. 그녀는 “목마르지 않는 사람”, 곧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 복 있는 자)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우리 또한 자기 안의 라벨을 떼어 내고 속에서 솟는 은혜의 물줄기를 이웃에게 흘려보낼 때 샘물의 수위가 더욱 높아집니다.
로마서 5장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πίστις(피스티스, 믿음)로 δικαιωθέντες(디카이오덴테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 되었으니….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선포합니다. 디카이오덴테스(의롭다하심을 받은)는 한순간 내려진 무죄 판결이 계속 유효함을 가리키는 부정과거 수동 분사입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는 구절 속 συνίστησιν(쉬니스티신, 붓다·입증하다)라는 현재형 동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지금도 사랑을 끊임없이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는 εἰρήνη(에이레네, 평화)는 개인의 난로가 아니라 도시 난방관이며, 따라서 שָׁלוֹם(샬롬, 완전한 평강)의 권능이 미혼모 보호소와 쉼터 골목까지 구석구석 따뜻하게 미칩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은 손에 들고 다니는 작은 저장 장치가 아니라 끝없이 흐르는 관로입니다. 헌신, 즉 봉사와 연합은 그 밸브를 여는 일입니다. 예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하십니다(요 14:27). 주님은 평안을 ἀφίημι(아피에미, 끼치다)로 우리 손에 놓으시고, δίδωμι(디도미, 주다)로 이어지게 하십니다. 이 평안은 고통의 맥박을 선명히 듣게 하는 청진기이며, 약자를 품을 근력을 길러 줍니다.
이제 저는 네 가지 초대를 드립니다. 첫째, 말씀으로 과로와 죄책감의 반석을 가볍게 두드려 생수 분수를 경험하십시오. 둘째, ‘실패자’라는 낡은 명찰을 떼고 μακάριος(마카리오스, 복 있는 자)라는 새 이름을 받아들여 자존감과 사명을 회복하십시오. 셋째, 예배와 성만찬, 소그룹 식탁으로 이동하여 가족의 유대를 굳히십시오. 넷째, 지역사회와 연결하여 도시를 데우는 샬롬의 관로를 여십시오. 아침 일곱 시에 말씀 묵상을 알리는 알람을 맞추고, 점심시간 10분 동안 걷기 기도를 들으며 “주님께서 이미 여기 계십니다”라고 고백해 보십시오. 이번 주 한 사람에게 따뜻한 음료나 책 한 권을 선물하며 샘물을 흘려보내시고, 월 한 번의 봉사 약속을 통해 사랑의 관로를 정기적으로 열어 두십시오. 매순간 반석을 두드리십시오, 샘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광야에도, 지하철에도, 온라인 회의실에도 주님께서 먼저 오셔서 서 계십니다. 우리의 작은 순종이 도시 전체를 적시는 은혜의 강이 됩니다. 성읍과 들, 들어옴과 나감, 그 모든 동선 위에 바룩(축복)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