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우리는 고속도로를 달리며 평범한 날의 표지판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는 대화가 필요하다 – 신”, 이런 문구들 말이죠. 칠흑 같은 배경 위에 하얀 글씨로 적힌, 어딘 가에서 온 듯한 하나님의 속삭임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이 우리와 이런 방식으로 소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혼란스러울 때마다 고개를 들어 광고판이나 구름을 바라보며 답을 찾을 수 있다면, 또는 매주 정해진 시간에 라디오를 켜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요?

우리 대부분은 그렇게 명확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길 원합니다. 하지만 삶의 상황과 메시지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이들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화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고, 자신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 합니다.

목회자로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열망은 저에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중요한 결정 앞에 선 사람들이 저에게 다가와 “하나님께서 저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고 싶어요. 갈림길에 섰는데, 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라고 묻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설교 주제를 물으면, “내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라고 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분명,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은 우리 많은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하나님과의 대화는 종종 우리가 기대하는 광고판이나 라디오 방송처럼 분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다는 우리의 열망은,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뜻을 알려 주시길 더 간절히 원하시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그 뜻은 어떤 비밀도 아니며, 우리가 숨바꼭질하듯 찾아내야 하는 실존적 게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뜻을 알고 따르기를 진심으로 바라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뜻을 영적 엘리트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로 생각하곤 합니다. 마치 친구와 아침 식탁에서 수다를 떠는 것처럼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왜 자신은 그럴 수 없는지 고민합니다. 하지만 사실,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은 그리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동하는 용기만 있다면 충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르기 전에, 우리는 먼저 하나님과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시는 방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규칙을 어긴 사람을 찾아내 벌을 내리기만 기다리는 분으로 잘못 인식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른 하나님의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고린도후서 1:3),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요한복음 10:11), 우리를 자녀라 부르실 만큼 사랑하시는 하나님(요한일서 3:1), “좋은 선물만 주시는 아버지”(야고보서 1:17)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의 본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예수님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고, 우리를 사랑하며, 우리에게 최선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까지 가셨습니다.

로마서 12장 1-2절은 하나님의 뜻이 얼마나 선하고, 받아들일 만하며, 완전한지를 명확히 말해 줍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에게 최고와 최선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과정이 때로 어렵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유언 때문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그것을 따르고 싶지 않은 마음을 갖기도 합니다. 목회자로서 저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과의 싸움이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자존심 때문에 발생한다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변화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은 때때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만듭니다. A.A. 밀른이 곰돌이 푸를 통해 표현한 것처럼, 우리는 성장하고 변화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편안함의 영역에 머무르길 원하며, 변화는 그 편안함을 위협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우리의 여정에서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신호나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변화를 동반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교만 또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여정에서 우리를 방해하는 큰 장애물입니다. 교만은 우리가 스스로를 너무 중요하게 생각하게 만들며, 하나님의 계획보다 우리 자신의 계획을 우선시하게 합니다. 교만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보다는 우리 자신의 뜻을 따르게 만듭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위험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마치 아이가 바쁜 도로로 뛰어들려고 할 때, 그 아이가 자신이 처한 위험을 모르는 것처럼, 우리도 교만으로 인해 우리가 처한 영적인 위험을 인식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비결은 바로 항복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 삶에서 이루시도록 허락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하시고, 우리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며, 우리의 삶을 더욱 풍부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의 뜻을 따를 때,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가지고 계신 계획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역할은 단지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 맡기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것입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 속에서 블라디미르가 포조에게 던진 질문, “어디로 가요?”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포조는 이에 “On”이라고 답변합니다. 즉 계속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삶 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한 응답을 상징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어디로 가느냐?”라고 묻고 계시며, 이 질문은 우리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요구합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과 교만이 우리를 뒤로 물러서게 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꿈꾸어 온 삶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대답은 어떠해야 할까요? 니콜 노드먼이 제시한 대답처럼, “매 계절의 변화로 저를 새롭게 만드시는 것처럼 계속 갈 거예요. 여름, 겨울, 가을, 봄을 만들어 주시는 것처럼 저를 만들어 주실 거예요.”라고 우리는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적인 손길에 맡기고, 우리 삶의 모든 계절을 통해 그분이 우리를 어떻게 형성하고 변화시키시는지를 신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변화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