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천국의 소리는 노래가 아니라 웃음 소리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웃음의 거룩함은 C.S. 루이스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한 그룹의 신학자들이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에게 다가와 “당신이 지금까지 발견한 가장 중요한 신학적 발견은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루이스는 미소를 지으며 “나는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시는 것을 즐기기 위해 존재한다”고 대답했습니다.

들으셨나요?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즐기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을 즐기고, 인생을 즐기고, 그분이 창조하신 세상을 즐기기를 원하십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 축복을 전합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

아주 오래 전, 교회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신념을 나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교리문답”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곧 그 목록이 너무 길고 외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그들은 “짧은 교리문답”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 신념을 요약한 것이었습니다. 이 짧은 교리문답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아시나요? “문1. 인간의 최고 목적은 무엇입니까? 답: 인간의 최고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하나님이 즐거움을 포기하게 할 거라고 생각해서 하나님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많이 만납니다. 그들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파티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하며, 영적이 된다는 것은 비참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인상을 줍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파티가 이제 막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속에 그리스도의 기쁨이 있으면 미소 짓고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쁨과 재미를 창조하셨습니다. 즐거움은 그분의 아이디어였습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질수록 더 많은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놀고 그가 창조한 삶을 즐기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저는 크리스천과 교회가 지치는 이유 중 하나가 놀이 감각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가르치실 때 장난기 가득한 아이들이 예수님을 향해 달려오는 장면을 기억하시나요? 시무룩한 제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어린이는 보고 듣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어디 있나요? 이 아이들이 예수님을 방해하고 있는 게 안 보여요? 이 아이들을 여기서 내보내요!”

성경에 따르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매우 화를 내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에 경악하셨어요. 예수님은 “뭐 하는 거예요? 아이들을 내게로 오게 하세요. 아이들을 방해하지 마세요. 사실 이 아이들처럼 천국을 영접하지 못하면 여러분은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수용적이고 의존적이며 사람을 신뢰합니다. 그들은 오직 자신의 기쁨을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을 위해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이 놀고 있을 때 가장 즐거워하신다”는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자녀의 웃음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우리 영혼으로 바로 전달되어 종종 눈물을 흘리게 합니다. 우리가 아이의 웃음과 기쁨을 통해 그 정도의 기쁨을 얻는다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의 웃음과 기쁨을 통해 얼마나 큰 기쁨을 얻으실 지 상상해 보십시오.

G.K. 체스터턴은 “하나님은 우주에 남은 마지막 아이” 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기쁨을 잃어버렸다고 썼습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기쁨이 가득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과 저를 창조하셨을 때 그의 마음에는 큰 기쁨이 있었습니다.

토니 캄폴로는 손자가 어린 소년이었을 때 무릎을 꿇고 함께 놀아주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는 손자를 위아래로 튕기고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가 바닥에 내려놓곤 했습니다. 캄폴로는 이렇게 할 때마다 손자가 “다시 해줘요, 할아버지! 다시 해줘요!” 그러면 캄폴로는 또 그렇게 하곤 했습니다. 물론 그의 손자는 그에게 다시 한번 외칩니다. “다시 해봐요, 할아버지! 다시 해줘요!”

캄폴로는 하나님께서 첫 번째 날에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어린아이 같은 무언가가 있으셨다고 썼습니다. “다시 해! 다시 해!” 그리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날에 창조하신 후, 하나님은 스스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해! 다시 해!” 그리고 500억 번째, 1조 번째 창조 후, 하나님은 손뼉을 치며 “다시 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는 “또 해봐!”라고 외치시는 기쁨과 재미와 놀이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캠폴로, “이야기를 들려줄게”, 12, 13쪽, 내슈빌, 말씀출판사, 2000).

하지만 우리 세상에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기쁨을 잃었습니다. 재미와 웃음을 잃었습니다. 죄와 냉소주의가 들어와서 우리는 놀 줄 아는 능력을 잃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쁨을 되찾기를 원하셨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오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 중 하나는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10:10)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기쁨을 되찾을 수 있도록 그분의 즐거운 성품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이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누가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 유대 율법의 전문가로 알려진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것을 보면 그 예를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는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먹고 마시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러 왔는데, 너희는 나를 대식가, 술주정뱅이,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비난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파티광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너무 열심히 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다 알아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우리가 다시 인생을 즐기게 하려고 노력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이 질문에 답해보십시오. “내 인생을 다시 살아야 한다면…”? 여러분의 삶에서 하나님의 기쁨을 경험하기를 기다리지 마세요. 지금 바로 해보세요! 다시 노는 법을 배우십시오.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기쁨을 누리십시오. 바울의 말을 기억하세요.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로마서 15:13)

백동인-밴쿠버한인장로교회 선교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