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시 121:1).

이 시는 절망의 고백으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순례자의 시선이 먼저 움직입니다. 발은 아직 돌길 위에 있고, 숨은 가쁘며, 예루살렘은 보이지 않는데 눈이 먼저 들립니다. 인생은 종종 오르막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감정부터 말하지 않고 시선을 먼저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지형적으로 ‘올라가는’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표제가 붙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쉬르 함마알로트’입니다. ‘마알로트’는 단순한 지리적 상승이 아니라 단계적 고양, 영적 상승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 노래는 목적지에 도착한 자의 노래가 아니라, 아직 오르는 자의 노래입니다. 질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이 질문은 불신의 질문이 아니라, 방향을 찾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곧바로 고백이 터집니다.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2절). 순례자의 드라마는 이렇게 전개됩니다. 묻는 믿음—올려다보는 시선—선포하는 고백. 이것이 이 시의 구조입니다.

1.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1–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기서 ‘도움’은 히브리어 ‘에제르’입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전투 현장에서 군대를 지원하는 강력한 원군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창세기에서 “돕는 배필”을 말할 때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이 도움은 감정적 격려가 아니라, 존재를 지탱하는 능동적 개입입니다.

그리고 그 도움의 출처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입니다. 창조주 신앙은 추상적 교리가 아닙니다. 순례자는 산을 바라보며 산보다 크신 분을 기억합니다. 산은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산이 우상숭배의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산 자체에 기대지 않습니다. 산을 넘어 창조주를 봅니다. 미국 문학의 전통은 종종 인간을 광활한 자연 앞에 세워 놓고 그 무력함을 묘사합니다. 그러나 시편은 다릅니다. 자연의 웅장함은 인간을 작게 만들기보다, 창조주를 크게 드러내는 배경이 됩니다. 창조 신앙은 문제의 크기를 줄이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크기를 회복시킵니다.

2.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3–6)

3절부터 6절까지 네 번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지키다.” 히브리어 ‘샤마르’입니다. 단순히 바라본다는 뜻이 아닙니다. 언약을 보존하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며, 깨어 감시한다는 의미입니다.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기서 동사는 미완료형으로 사용됩니다. 지속적 행위를 나타냅니다. 한순간의 보호가 아니라, 끊임없는 보호입니다. 밤이라는 시간은 인간의 통제력이 사라지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시간에도 ‘현재형’으로 지키십니다.

“여호와는 네 그늘이시라.” 고대 팔레스타인의 태양은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그늘’은 단순한 휴식이 아니라 생존의 공간입니다. 오른쪽은 전투에서 방패가 드는 손의 반대편, 곧 노출된 쪽입니다. 그 가장 약한 지점을 하나님이 가리신다고 말합니다.

밤에는 “달이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고대에는 달빛이 정신을 혼란하게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낮의 물리적 위협과 밤의 심리적 위협을 모두 언급합니다. 낮과 밤, 외적 위험과 내적 불안, 둘 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선언입니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7–8)

7절과 8절은 선언의 절정입니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기서 ‘영혼’은 히브리어 ‘네페쉬’(נֶפֶשׁ)입니다. 단지 영적인 부분이 아니라, 생명 전체를 가리킵니다. 육체와 감정과 호흡을 포함하는 존재 전체입니다. 하나님은 사건만이 아니라 존재를 지키십니다.

“네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출입’은 일상의 모든 움직임을 뜻합니다. 히브리어 표현은 삶의 총체성을 나타내는 관용구입니다. 출생과 죽음,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 모든 경계를 하나님이 감싸신다는 뜻입니다. 교회사 속에서 이 구절은 전쟁과 이주, 박해의 시대에 자주 인용되었습니다. 세계교회는 난민의 행렬 속에서 이 말씀을 붙들었고, 한국교회 역시 피난길과 산업화의 혼란 속에서 “출입을 지키신다”는 약속을 노래했습니다. 이 시는 안전의 보장이 아니라, 동행의 보장입니다.

“지금부터 영원까지.” — 이 시는 오르막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끝납니다. 발은 여전히 길 위에 있지만, 시선은 영원을 봅니다. 인생의 오르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선이 달라지면 삶의 해석이 달라집니다. 낮의 태양이 압박할 때, 밤의 불안이 밀려올 때, 스스로를 바라보던 시선을 들어 올리십시오. 도움은 환경에서 오지 않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옵니다. 여러분의 발걸음이 흔들릴 때, 지키시는 이름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리고 영원까지. 그 이름이 여러분의 오르막을 동행하십니다. 아멘.

백동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