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포틀랜드 갈보리장로교회 담임목사

개인의 깊은 고통과 간절한 호소가 담긴 개인적 탄식 시는, 마치 인간 존재의 한복판에서 울리는 절박한 외침과도 같습니다. 이 시편들은 43편에 달하며, 시편의 숲 속에서 그 울림은 고유한 메아리를 형성합니다. 그 구조는 일정하면서도, 그 흐름 속에서 변주를 거듭합니다. 호소의 순간, 시인은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절실한 부름으로 문을 엽니다. 그의 목소리는, 고독과 절망을 뚫고 하늘에 닿기를 갈망하듯, 그 시작이 간절합니다.

“탄식”에서는 시인의 고뇌가 길게 혹은 짧게 펼쳐집니다. 여기서는 삼위일체 같은 주제(하나님, 나, 그리고 나의 적)가 어우러져, 그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대화, 나아가 자신을 괴롭히는 대적과의 긴장 관계로 드러납니다. “신뢰의 고백”에서는 “그러나”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시작되는 반전을 통해, 고통의 무게를 견디며 다시금 믿음을 선언하는 순간이 마련됩니다. 이는 탄식과는 대조적으로 믿음의 빛을 발하며, 영혼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신뢰를 쏟아냅니다. “청원”은 시인이 하나님 앞에 자신의 요구를 아뢰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시인은 두 가지 중요한 청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고난에 개입해 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서원” 또는 “찬양의 선언”에서는 시인이 두 갈래 길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있을 것을 믿으며 미리 찬양을 시작하거나, 응답을 받고 나서 그 찬양을 드리기로 서원합니다.

예컨대, 시편 142편에서 우리는 개인적 탄식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시인은 자신을 에워싼 위협 속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고충을 호소하고, 하나님을 자신의 피난처로 여기며, 구출을 간청합니다. 그리고 구출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 찬양할 것을 선언합니다. “내가 소리 내어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소리 내어 여호와께 간구하는도다 내가 내 원통함을 그 앞에 토하며 내 우환을 그 앞에 진술하는도다” (시142:1-2)

실제로 우리 모두는 작은 공간에 갇혀 있는 듯한 두려움, 이른바 폐소공포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특히 사람들이 붐비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때의 이러한 공포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춰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이 마음 한구석을 살짝 두드릴 때가 있지 않습니까? 갇혀 있다는 느낌은 또 다른 두려움, 즉 버림받을 것에 대한 공포로 이어집니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이 이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자신이 누구인지, 현재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생각과 싸웁니다.

시인 케네스 패천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공포는 여기, 이곳에, 단지 이것일 뿐인가에 대한 공포가 아닌가? 다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 정말로 갈 곳은 우리가 있는 이곳뿐이라는 것에 대한 공포가 아닌가?” 그것은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감정입니다. 여러분은 일이 지루해진 직장에 갇혔다고 느낍니다. 사랑이 사라진 결혼 생활에 갇혀 있고, 어느 쪽도 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에너지를 쏟아 부어 생기 없는 관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의사가 없습니다. 병든 노부모를 돌보느라 집에 갇혀 있습니다. 사업이나 투자가 거의 허무에 가까울 정도로 추락한 경제적 제약에 갇혀 있습니다. 현실에서 손을 놓고, 결혼, 가족, 직장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합니다. 갇힘의 상황과 그 목록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속된 감정입니다. “내가 하든 말든 저주받을 것이다.” 갇힌 느낌에 버림받은 느낌이 더해지면 문제는 더욱 심화되어 파멸의 벼랑 끝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탄식시인 시편 4편은 바로 이러한 두려움과 버림받음의 감정적, 영적 공격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내가 갇혔다고 느낄 때”의 비천해진 감정에 공감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이상입니다. 첫 구절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내가 곤궁에 빠졌을 때에, 나를 막다른 길목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즉,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 주님이 제게 숨 쉴 공간을 마련해 주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숨 쉴 공간, 즉 여유로운 은행 밸런스, 경제적 부담의 완화, 사업에서 희망의 한 줄기, 가족 간의 위로와 지지의 말,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지 않습니까? 곤경에 처했을 때의 숨 쉴 공간. 그럼 어떻게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나요? 어디로 가면 찾나요? 우리가 갇히고 버려진 느낌이 들었을 때 시편 기자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왜냐하면 그도 같은 상황을 겪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먼저, 나 자신의 문제에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것을 실토합니다. “내 경우에는, 사람들이 내 믿음을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가뭄의 시기에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소용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작물이 위협받고 있었고, 땅의 생태가 위태로웠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오직 그분 만이 우리에게 필요한 좋은 비를 보내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줄 수 있을까?” 하며 불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주님의 환한 얼굴을 우리에게 비춰 주십시오’” (시편4:6).

그들이 원했던 좋은 것은 비였습니다. 그러나 제 때 비가 오지 않자 그들은 좌절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알과 같은 이교도 신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 창조와 출애굽의 주님만이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을 때, 그들은 시인에게 쓴 소리와 가혹한 공격을 하며 돌아섰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문제에 맞섰습니다. 그것은 문제를 하나님께 가져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시4:4-6) 만약 그가 그것을 회피하려고 했다면,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더욱 고통스러워졌을 수도 있고, 게다가 그가 자신의 문제로부터 도망치면,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께 가져가 도움을 청할 수 있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