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을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여행의 의미를 새롭게 정의한 어느 여행사의 모토입니다. 이 회사의 이름은 “길을 잃는 여행”입니다. 그들은 인생 최고의 모험은 험난한 곳에서 길을 잃어버릴 때 일어난다고 주장합니다. 이 여행사는 여행객들이 공항에 모이면 여행에 대한 필수 정보, 위성 전화 및 생존 장비를 지급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외딴 황야나 사막 같은 척박한 목적지로 보냅니다. 그리고 이 미지의 여행을 마친 후 안전한 문명 세계로 돌아오는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결정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5: 21-28을 보면 예수님께서 “길을 잃는 여행”을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이 구절은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두로와 시돈은 예수께서 마지막으로 머무신 갈릴리에서 약 50 마일 떨어진 이방인 도시였습니다. 예수께서 50마일이나 떨어진 이방인 영토로 여행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무슨 급한 일이 있었을까요? 주님이 “길을 잃는 여행”을 신청하셨을까요? 성경에 예수님이 왜 두로와 시돈에 가셨는지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잃은 듯한 이 여행을 추적하는 것이 오늘 주제입니다. 마태복음 15:22은 이것을 리포트합니다. “마침, 가나안 여자 한 사람이 그 지방에서 나와서 외쳐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귀신들린 딸을 가진 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50마일이나 떨어진 그곳에 가셨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누가 그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 분명한 것은 그 누구도 가나안의 상처받는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곳에 사는 사람들까지 관심을 기울이셨다는 것입니다. 이 가나안 여인을 만난 후 예수께서 갈릴리 바다 주변의 평소 사역지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이같이 모험적인 여행을 택하신 유일한 이유는 이 절망에 빠진 여인을 구원하려는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만난 사람은 이스라엘 여성이 아니라 가나안 여성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은 특히 가나안 사람과 말조차 섞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인들을 유대인의 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예수님은 그녀의 외침을 듣고서도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즉시 이 여성을 격려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들도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간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마저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만 보내졌다!”고 하십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이 계속 주님께 부르짖은 것에 놀랍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분 앞에 와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주님, 도와주세요!” 그녀는 반복해서 계속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전히 “아이들의 빵을 가져다 개들에게 던지는 것은 옳지 않다.” 고 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 이 여인의 태도에 놀라시게 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개들도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 학자들은 이 여성과 그리스도의 대화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평소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 예수님께서 이 여성을 시험하신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정말로 그녀의 딸을 고칠 수 있다고 그녀가 믿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건의 마지막에 그녀의 위대한 믿음에 대해 칭찬하십니다!

예수님에게서 믿음으로 칭찬받은 사람이 성경에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단 3명뿐입니다. 예수에게 종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로마 장교, 12 년 동안 피를 흘리며 고생하다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잡아당긴 여인, 그리고 귀신들린 딸의 치유를 위해 주님께 나아온 이 가나안 여성 등이 그들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중 누구도 주님께 나아가 도움을 요청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법에 따라 주님과 분리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가나안 여인은 유대인에게 말을 걸 수조차 없는 낮은 신분의 사람이었습니다. 12년간 하혈하던 여인은 율법의 정신에 따라 사람들과 접촉하면 안 되었습니다. 로마 장교는 유대 민족을 억압한 제국의 대표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들 모두는 유대인과의 접촉이 금지되었습니다. 이 세 사람 중 누구도 예수님을 만나 도움을 요청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한 그들을 거부하거나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큰 믿음의 사람!”이라고 하면 우리는 그들이 보통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수퍼 히어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있는 사람들입니다. 절망이 얼마나 무섭습니까? 절망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신문에서 매일 보지 않습니까? 살인과 투신과 가출. 로마 백부장과, 혈루증 걸린 여인, 귀신 들린 딸을 둔 이방인 어머니가 느꼈을 절망감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의 고통에 숨을 쉴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절망적인 순간에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 여인은 그녀의 절망을 주님께 가져갑니다. 그러나 주님은 처음에 그녀를 외면하시는 듯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어머니의 고통에 무감각하셨을까요? 가나안 여인의 첫 번 외침이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녀는 죄 많은 인간이 주님께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그분의 자비에 의지했습니다. 침묵하신 주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나안 여인의 큰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준에서 위대한 믿음은 아주 간단합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절망을 가져가고 그분의 자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는 죽음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의 권능과 위엄, 자신의 생명까지 버리셨습니다. 그 사랑은 너무나 위대해서 돌이킬 수 없는 사랑입니다. 절박한시기에는 절박한 조치가 필요합니다. 절망의 시기에는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자비를 간청해야 합니다.

백동인 목사(주 유럽 선교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