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유월절 양을 잡는 무교절이 되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가서, 우리가 먹을 수 있게 유월절을 준비하여라”고 시키셨습니다. 그 날은 바로 고난주간 목요일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법과 관습에 따르면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 두 가지 준비가 꼭 필요했습니다.

1) 첫째, 유월절 전날에 양초에 불을 붙이고 집 전체에 누룩이 있는 가를 잘 살펴야 했습니다. 그리고 누룩이 발견되면 즉시 그 집에서 제거해야 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맞은 첫 번 유월절에는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만들어 먹었습니다. 빵 구울 충분한 시간이 없이 서둘러 이집트를 탈출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누룩으로 만든 빵은 곧 출애굽에 대한 기억을 의미했습니다.

2) 둘째로, 히브리인들은 성막에서 어린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은, 죽음의 사자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들을 넘어갔다”는 것을 기억시키기 위해 제단에서 태워졌습니다. 그리고 소금물 한 그릇과 쓴 나물 한 그릇을 테이블 위에 차려 두어야 했습니다. 소금물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흘렸던 눈물을 의미했고, 쓴 약초는 노예의 괴로움을 생각 나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유월절 목요일의 식탁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서 그 식탁 재료를 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시는 순례자들로 넘쳐났습니다. 제자들이 사둔 생필품은 이미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어디 가서 새 것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주님, 이 늦은 시간에 어디에서 그 재료를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 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성 안으로 들어가면, 물동이를 메고 오는 사람을 만날 것이니, 그가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가거라 …. 그리고 거기에서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이 가서 보니, 예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똑같은 것을 찾아서 유월절을 준비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테이블에 둘러 앉았습니다.

제자들은 유월절 만찬 의식의 순서를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유월절 식사는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어떻게 탈출할 수 있었는지를 말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특별한 음식을 먹고, 출애굽에서 조상들이 받은 은혜를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마지막으로 유월절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식사 후에 다음과 같이 놀라운 선포를 하셨습니다.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또 빵을 들어서 감사를 드리신 다음에, 떼어서 그들에게 주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은 뒤에, 주님께서 잔을 들어 감사하시고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유월절 저녁 식사를 “주님의 만찬”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그 유월절 목요일에 이 만찬을 계속해서 열어 주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핵심이 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누가복음 20:20) 히브리서 기자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명하신 언약의 피입니다.” (히브리서 9:20)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 사이의 계약 관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가운데 어떤 분은 이런 고대의 피 이미지와 예수님이 만찬에서 강조하신 언약의 피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동물 희생이 현대인에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왜? 피가 제단에 뿌려 졌습니까? 성결을 위해서? 그게 대체 무슨 뜻인가요?

우리의 죄는 언약을 취소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를 누리기에 완벽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희생이 우리를 위해 갈보리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처럼 희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이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옹호자시라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2:1을 보십시오. “누가 죄를 지을지라도, 아버지 앞에서 변호해 주시는 분이 우리에게 계시는데,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원론에 대해서 진보적인 신학자가 묻습니다. “왜 그리스도의 의뢰인은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까?” 사실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나는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배우자에게 불충실했다.” “나는 낙태를 했고, 나는 도둑질도 많이 했다.” “그래서 내가 나를 용서 못하는데 하나님 나를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다는 말인가?

결혼식에서 목사님 앞에서 서약을 하고 결혼한 사람이 배우자에게 헌신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 최선을 못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결혼이 파기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그 삶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십니다. 게으름, 태만도 심지어 죽음도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며 반복되는 죄 조차도 그 관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언약 관계에 주의해야할 또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24:6-8을 보면, 모세가 피를 가져다 백성에게 뿌리며 “보아라, 이것은 주께서 이 모든 말씀을 따라, 너희에게 세우신 언약의 피다” 라고 말했습니다. 피는 뿌려져야 합니다. 유월절 다락방에서 예수님은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질 때까지, 나는 다시는 유월절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피가 이제 단 한 번 제단에 뿌려진다고 하셨습니다. 매일, 죄 지었을 때 마다, 절기마다, 매년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는 대신 우리는 사랑의 새 언약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단 한번으로 영원히 구속력이 있는 피로 인해 우리는 결코 다시 피를 뿌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린양 이신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짓는 우리들을 위한) 최종적이고 완전한 희생 제물로 자신을 바치셨을 때, 우리에게 주신 그의 선물은 다름 아닌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는데 피 흘림의 언약을 사용하셨습니다. 십자가의 반대편에 있던 우리들이 받은 선물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은 피를 먹지 않아도 됩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 갑니다. 이제 여러분은 여러분의 죄를 황소의 피로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뱀파이어의 피로 씻을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진실한 피입니다. 완전한 피입니다. 예수님의 피 밖에 없습니다!

갈보리장로교회: 8060 SW Brentwood St, Portland, OR 97225 / 주일예배: 12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