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마다 반복해서 우리 귀에 들리는 주제는 바로 희망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끊임없이 약속된 성취를 기대하며 빛나는 미래를 그려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고난을 해결하시고 절망을 걷어 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하나님의 행동과 우리가 감히 바라볼 수 있는 것, 그리고 희망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뉴스에서 들려온 13살 소녀의 이야기는 그러한 예입니다. 퇴행성 뇌 질환으로 앓던 그 소녀는, 의사들의 권유로 생명 유지 장치를 끊고 안쓰럽게 고통스러운 죽음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기적을 희망하는 마음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의사들은 인간다운 죽음을 원했지만, 부모님은 기적적인 치유를 원했습니다. 결국 아무도 원하던 것을 이루지 못했고, 소녀는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았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병이 나은 사람들의 기쁨과 아픈 사람들의 슬픔을 함께 느낍니다. 때로는 인내와 용기, 고난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영적인 도움을 하나님께 구하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심지어 우리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실직 상태에서 새 직장을 희망할 수 있습니까? 긴장된 결혼 생활에서 화해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남은 생애 동안 자녀를 위한 우리의 희망과 계획에 대해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욥기에서 희망의 교훈을 배웠습니다. 욥은 다양한 희망을 그려봤습니다. 신체적 치유와 고통에 대한 해답, 명성의 회복 그리고 인내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와 간절한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하나님의 오심을 경험하고, 위로의 임재와 그가 바라는 것이 늘 하나님의 뜻이 아니란 것을 엄숙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25장의 가르침은 역시 희망에 관한 것이지만, 다른 종류의 희망입니다. 욥의 희망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으며, 자신의 고난이 종식되기를 원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해결책에 한정되었습니다. 욥은 새로운 삶이나 시작, 죽음 너머의 나은 존재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희망은 이 세상에서의 고통의 해소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의 환상은 우리에게 더 큰 차원의 희망을 제시합니다. 이사야는 모든 인류의 고난이 영원히 끝나기를 기대합니다. 이사야의 희망은 불행의 종결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의 종결, 심지어 죽음의 종결입니다. 이사야는 모든 백성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서로 돕고, 하나님의 승리를 기리는 대잔치를 함께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이사야의 눈앞에는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사야가 그린 새로운 시대가 예수님을 통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벽한 지배를 ‘나라’라 칭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세례를 통해 그 나라에 들어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시민권과 성도가 된 것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의 동료 신자들과 함께 성도 됨을 기리며, 하나님께서 그의 산 위에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풍성한 음식과 고상한 포도주의 대축제를 바라봅니다.

이사야의 비전에서는 새로운 시대가 대축제와 함께 찾아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풍성한 잔치로 절기를 기리는 시기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연회와 향연은 항상 가족과 신앙의 중요한 축복 방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에서의 노예 해방을 유월절 잔치로 기리기도 했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죄와 죽음에서의 구원을 성찬으로 기리기도 합니다. 결혼식, 세례, 입교식 등의 행사들은 대게 연회의 기회가 됩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의 최후의 축제를 잔치와 연회로 묘사합니다.

“이 산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만민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실 것”이라고 이사야는 기록합니다. “그가 이 산에서 만민의 두루마리 곧 열방의 두루마기를 제하시고… 주 하나님이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임이라.” 모든 민족, 모든 국가, 모든 얼굴. 이것은 가슴 열린 잔치입니다. 소수의 선택된 자들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초대됩니다.

이사야가 이 구절을 기록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시기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욥이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실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지를 보았습니다. 기독교 교회는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기를 2,000년 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인생은 무엇보다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크리스마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의사로부터 생사를 가르는 소식을 기다리고, 건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무사귀환을 기다립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 올바른 사람을 만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희망이 실현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날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은 기다림의 삶이지만 이미 본 미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기다림입니다. 우리는 하늘의 잔치에 대한 이사야의 환상에서 미래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주의 만찬의 교제에서 미래를 어렴풋이 보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잔치의 표본인 “다가올 명절의 미리 맛보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지상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 우리는 승리의 성도들의 교통과 같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이날 우리는 이미 천상의 축제에 들어간 모든 성도들을 기억하고 그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승리의 예를 봅니다.

이미 본 미래를 기다리는 것을 희망이라 부릅니다. 아플 때 치유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우리가 외로울 때 교제를 기대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바랄 수 있을까요? 우리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고통에서의 구원을 바라볼 수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들을 받을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욥은 우리가 잘못된 것을 바라거나 실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실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세속적인 희망이 죽고, 모든 세속적인 것이 사라질 때, 우리가 가장 길게 기다렸던 것이 남습니다. 사실 그때, 우리는 진정한 희망의 완벽한 실현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약속하신 마지막 기쁨입니다.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우리는 그 구원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자!”

백동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