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타임지는 비행기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 유명한 사람들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공군 1 호기 내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대통령은 비행 공포를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는 순전히 의지의 힘으로 이 비행을 지탱하고 있다”고 항변했습니다. 하지만 세계에서 비행기보다 더 안전한 교통 수단은 없습니다. 물론 사고가 발생하면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그럴 확률은 아주 드뭅니다.

상업용 항공기보다 벌침으로 사망할 가능성이 두 배나 높습니다. 자전거로 사망할 확률이 110 배 더 높습니다. 자동차보다 여객기로 여행하는 것이 19 배 더 안전합니다. 보잉 747기가 미국의 연간 고속도로 사망자와 동일한 사망률을 달성하려면 10 년 동안 매일 추락해야 합니다. 토네이도로 사망할 확률은 15만 분의 1이지만, 여객기 비행으로 사망할 확률은 천만 분의 1입니다! 상업용 비행기는 비상시에 비행기의 거의 모든 시스템을 제어할 수 있는 백업 시스템을 잘 갖추고 있습니다. 하나가 실패하면 다른 하나가 작동합니다. 모든 제트기는 다중 엔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3 개의 엔진을 장착한 비행기도 비상시에 하나의 엔진으로 비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비행기에 중복 랜딩 기어와 후진 시스템이 있습니다. 그러니 여객기로 비행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십시오.

한 세기 전에 프랑스 의사 에밀 쿠에 (Emile Coué)는 심오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의 의지가 상상력과 충돌할 때 상상력이 위력을 발휘한다.”  다시 말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자아가 상상력과 충돌할 때, 우리의 창의적이고 우뇌적인 자아, 즉 상상력이 항상 승리합니다.  간단히 말해서, 저와 여러분의 상상력이 열쇠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어린이는 침대 아래에 괴물이 없다고 듣지만 불이 꺼지면 상상력이 솟구치며 괴물이 나올까 봐 몸서리 칩니다. 사실 두려움의 대부분이 우리 상상의 산물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를 위협하는 괴물은 없지만 우리의 상상력은 열광합니다. “아프면 어떡해?” “내 아이가 잘못된 유행에 빠지면 어떻게 될까?”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거나 주식 시장이 폭락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는 사고와 재난을 상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8:14-15)

바울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단순한 상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과 상상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걸을까요? 우리는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어떤 삶이 다가오든 간에 모든 것을 처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확신을 가지고 어깨를 펴고 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패배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복잡하게 꼬이고 있습니다.

제2 차 세계 대전 중 하버드 의과 대학의 헨리 K. 비처는 전투에서 부상당한 이탈리아 군인들을 연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는 심한 상처를 입은 병사 세 명 중 한 명만이 마약류인 모르핀을 요구한다는 사실을 목격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느끼지 않거나 통증이 경미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패턴은 그가 이전에 마취 전문의로서 보았던 것과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병사들과 매우 유사한 상처를 입었던 일반 환자의 80 %는 모르핀이나 다른 진통제를 간청했습니다.

아시는 대로 모르핀은 주로 환자의 공포와 불안을 경감시키는 마법을 부립니다. 병사들이 일반 환자에 비해 모르핀을 거의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병사들은 자신이 입은 부상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전쟁터에서 멀어진 것에 대한 안도감이 통증을 크게 경감시켰다는 것입니다. 헨리 비처는, “부상 자체와 그들이 느끼는 통증 사이에는 단순한 연관관계가 없다.”고 결론을 맺었습니다. 통증은 대부분 다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 마음의 고통과 우리가 실제로 겪고 있는 어려움 사이에 연관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그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의 차이는 태도입니다. 그럼 그같은 태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돈을 잘 버는 집안 출신의 사람과 함께 일해 본 적이 있습니까? 그들은 특정한 방식으로 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종종 사실입니다. 은수저를 입에 물고 자란 사람들은 그 은수저를 평생 붙잡고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들의 타고난 권리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자기 성취로 마무리합니다. 그들은 성공을 확실히 상상하기 때문에 성공에 쉽게 접근합니다.

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저와 여러분이 금 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우리의 성공을 위해 사용될 수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 아닙니까? 바울이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기회라고 정말로 믿으면 우리 삶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이 되십니까? 믿는 자에게 정말로 그같은 마법이 일어납니다.

백동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