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면서 흔히 “결함”이라고 불리는 일련의 사건들에 직면하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을 받습니다. 관계가 파열되거나 우정이 손상되는 것은 분명 누군가의 잘못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관계가 무너질 때마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책임을 가리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부서진 관계를 어떻게 회복합니까?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에서 어떻게 구속되고, 회복되어 화해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노래로 썼습니다.

그것의 원인은 그의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끔찍한 죄를 백미러를 통해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한 죄책의 유령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까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그를 괴롭혔습니다. 시편 32 편은 용서받은 한 죄인의 MRI 기록입니다. 이 노래에서 다윗은 어떻게 자신이 저지른 죄의 슬픔을 용서의 기쁨으로 바꿀 수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1. 그는 자신의 죄를 인식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잘못과 실패를 들추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가 받은 사죄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주님을 생각하며, 즐거워하고 기뻐하여라” 라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잘못을 용서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이 한 일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내가 입을 다물고 죄를 고백하지 않았을 때에는, 온종일 끊임없는 신음으로 내 몸은 탈진하고 말았습니다.” (시32:3) 우리 모두는 이 은폐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신이 버린 쓰레기를 감추려고 빗자루를 들고 다닙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죄를 깨닫자 자신이 정당하다고 항변하거나 자신을 합리화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자신 안에 있는 여러 가지의 죄를 열거합니다. 그는 먼저, 허물(transgression)을 언급합니다. “허물을 용서받고 그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시32:1) 허물이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선을 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자주 금지된 영역을 넘어섭니다. 매일 우리는 넘어서는 안될 질투심, 정욕, 이기심, 무관심의 영역으로 넘어서곤 합니다.

다윗은 또한 “죄(sins)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다”고 언급합니다. “허물”과 “죄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무언가를 할 때,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은 허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면 그것은 죄입니다. 누군가에게 주님을 전했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서도 그것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막상 손을 펴지 못했습니다. 이것들은 허물이 아닌 죄의 내용들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죄악(iniquity)을 언급합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을 때나,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죄악(iniquity)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지만 방법이 잘못되어 끔찍한 결과를 야기시킨 죄들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쓰레기 분리수거 규칙을 지키지 않음으로 환경을 오염시킬 때 우리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용서를 깨닫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다윗의 노래는 슬픔의 노래가 아니라 기쁨의 노래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잘못에 처음에는 슬펐지만 하나님의 용서를 받고 기쁨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모든 종류의 죄에 대해 하나님은 완벽한 구제책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겪고 잇는 모든 영적 질병에 대해 영적인 치료법을 가지고 계십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시32:1)

“사함 받다”(forgive)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멀리 있게 나르다”(carry away)라는 뜻입니다.  “Carry away”가 왜 “forgive”라는 뜻이 되었는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속죄일에 숫염소 한 마리를 제물로 잡아 그 피를 지성소 안에 있는 언약궤 위의 속죄판에 뿌렸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마리 염소의 머리에 안수해서 이스라엘의 모든 죄를 그 염소에 뒤집어 씌운 후 그 염소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광야의 먼 곳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두 번째 염소에게 인간의 죄를 담당시킨 후 멀리 데려갔기 때문에, 그 염소에게, “염소”와 “사라지다”의 두 단어가 합해져서 “사라지는 염소”(scapegoat), 즉 “속죄염소”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궁극적인 영원한 “속죄염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과 불의를 그에게 담당시키시고 그를 속죄염소로 만들어 나무에 못 박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기 자신만을 위해 죽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합니다. (시32:1)

이것은 아이러니합니다. 우리가 죄를 은폐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그것을 드러내시지만,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 죄를 숨겨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분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그 누구도 더 이상 엿볼 수 없도록 덮어 버리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모든 죄들이 우리의 시야를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잊어버리셨다”는 것의 의미입니다.

미국에서 배우는 가장 위대한 사상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수정 헌법 제5조입니다. 그것은 미국 국민의 기본 권리를 기술한 것으로 그 가운데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큰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이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생명이나 신체의 위험에 두 번 처해져서는 아니된다.”

오늘 다윗의 노래는 영적 일사부재리의 원칙을 언급합니다. 우리가 한 번 정확히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회개하고 죄의 용서를 받으면 하나님께서는 결코 다시 그 죄값을 우리에게 묻지 않으십니다.

이제 멋진 소식으로 마무리합니다. 우리의 죄의 값을 완전히 지불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인해서 우리의 죄의 기록이 주님의 법정에서 완전히 삭제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이렇게 말한 이유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 (시32:6)

백동인 목사ㅣ갈보리장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