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창밖을 바라본다. 삼각형 꼭지점 모양의 앞집 지붕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에 한가위 추석을 지난 낮달이 떠있다. 키다리 버드나무가 이파리를 흔들며 소리를 낸다. 이제 곧 오레곤 힐스보로에 가을이 깊어지면 저 나무도 고운 단풍이 들것이다. 지난해에 이어 일년 반만에 다시 온 아들 내외의 집에서 창밖으로 보는 아침 풍경이다.

어제 저녁에는 비버튼 지역의 한 2층 식당에서 식사를 하였다.  김치찌개, 오징어볶음, 갈비가 놓인 식탁에서 한국의 가을, 그 시절의 추억을 함께 먹었다. 입이 무거운 아이는 오는 가을을 맞이 할 계획을 이야기했다.  몇 달 후면 지금의 타운하우스를 떠나 싱글 홈으로 이사를 한다고…

돈 걱정이 앞서 나도 모르게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지금의 집과 그 동안 저축해 둔 돈으로 해결하고 나머지 부족한 부분은 은행 융자로 충분히 가능하다며 안심을 시키는 것이었다.  착한 소년이었던 아들이 속 깊은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예전에 읽어주었던 ‘아기돼지 삼형제’라는 동화가 생각난다.

집을 떠난 아기 돼지 삼형제는 짚으로, 나무로, 벽돌로 집을 지었다. 어느 날 나타난 늑대가 입김을 세게 불자 짚과 나무로 지은 집은 날아갔고 두 형제는 잡아먹혔지만 벽돌로 지은 막내아들의 집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화가 난 늑대가 지붕으로 올라가 굴뚝을 타고 침입했으나 화덕에 큰 솥을 걸고 끓인 물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여태까지 공부만 했던 아들과 며늘아기가 오레곤에 뿌리 내린지 삼년이다. 그동안 새로운 이웃과 오가며 정을 나누는가 하면 아껴 쓰고 절약하면서 그들만의 세상에서 그들이 그리는 미래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기특하고 대견한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대로 자부심이 생겼다.  무슨 일에나 최선을 다하라는 삶의 교훈을 가르친 엄마돼지와 세상을 쉽게 대하지 않고 고달프게 벽돌집을 지은 막내 돼지의 의지가 결실을 앞둔 가을 같아서다.  우직할 만큼 성실한 아들내외는 늑대의 입김에 날아가지 않는 튼튼한 벽돌집을 지었고 굴뚝 아래 솥을 걸고 재난을 피하는 지혜로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렇게 맞은 아침이다. 며늘아이가 담궈 놓은 배추김치와 무깍두기가 잘 익었다.  거기다가 다시 어제 사온 재료로 맛있는 반찬을 만들어내었다. 그 중 하나가 고사리 무침이다. 미국에서 먹는 고사리 맛은 어떨까 하면서 입에 넣으니 한국에서 먹던 맛 그대로다. 한국 고사리가 아니라 오레곤 고사리가 입에 맞는 것처럼 한국에서 온 아들내외가 오레곤에 지은 벽돌집에서 잘 뿌리내리길 소망한다. 아니, 이 가을이 지나면 진정한 오레곤 사람으로 튼실한 뿌리가 내릴 것이라 믿는다.

공무원으로 정년퇴임을 맞은 나에게 있어서 이번 가을의 의미는 남다르다.  한 직장에서 평생을 보낸 후 뒤돌아보니 나무가 보이고 하늘이 보인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이 보이고 하늘에 뜬 낮달이 보인다. 그렇다.  나의 시대가 바람 지나간 하늘의 낮달처럼 지고나면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  따뜻한 오레곤의 벽돌집에 엄마의 교훈이 꽃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또 그 아이들에게 ‘아기돼지 3형제’의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