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유명한 호텔 수영장 입구에 다음과 같은 표시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구세주 없이는 수영하지 마십시오.” 죄의 늪에 빠진 사람에게는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삶을 바꾸는 데 도움을 줄 분은 구세주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허물과 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육사의 절정이라는 시를 소개합니다. 잘 아시는 대로 그는 독립투사로서 시인입니다. 그의 본캐(본래의 캐릭터)는 독립투사, 그리고 부캐(다른 캐릭터)는 시인입니다. 그는 몸만 성했더라면 시를 쓰지 않고 독립운동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만주에서 일제를 대항해서 게릴라전을 수행할 훈련도 받았습니다. 평생에 감옥에 밥 먹듯이 들락거리며 살았던 그는 자신의 최초의 수인번호를 자신의 호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이육사입니다. 그가 1940년에 ‘문학’지에 발표한 ‘절정’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매운 계절(季節)의 채찍에 갈겨 / 마침내 북방(北方)으로 휩쓸려 오다.

​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高原) / 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

​어데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 /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

​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 /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매운 계절의 채칙과 서릿발 칼날진 곳, 무릎 꿇을 수조차 없이 사방이 다 막혀서 더 이상 세상에 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을 때 그는 눈을 감아봅니다. 그때 그는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매운 계절의 겨울이 ‘강철로 된 무지개”같은 희망을 확신하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 시애틀을 다녀올 때 고속도로에 화려하게 펼쳐진 무지개 한쪽 끝을 차로 통과할 때가 있었습니다. 큰 아치형 무지개 다리 한쪽 끝을 지나는 것은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무지개의 한 쪽 끝을 지나면 또 다른 끝은 어디일까요? 그렇습니다. 이육사 시인은 무지개 다리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는 밟을 수 없고 정신세계에나 존재하는 그런 무지개가 아니라 한국인 누구나 밝고 올라서 희망의 저편으로 건널 수 있는 강철 무지개를 노래했습니다.

그의 말년 작품으로 그가 감옥에서 옥사한 후 1945년 12월에 발표된 그의 유고 시 ‘광야’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그는, “지금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민족에게 큰 소리로 외칩니다. 그 참혹한 암흑의 시기에 마음에 내키지 않을 노래를 불러야 할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일제의 몰락과 조국의 독립을 미리 예견한 듯합니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 – 그는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질 두 개의 원자폭탄을 예견했을까요?

그가 지은 또 다른 시 ‘청포도’에서도,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노래합니다. 그는 여기서 “흰 돛 단 배”를 언급합니다. 태평양 전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미군 항공모함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그는 흰 돛 단 배의 승전 소식과 함께 고달픔 몸으로 광복이 오고 만다고 확신했습니다.

창씨 개명을 당하고 그것을 거절해서 학교가 폐교되고 징용과 징병과 정신대로 끌려가고 그렇지 않으면 감옥으로 끌려가고 철저하게 민족혼이 말살되던 일제 36년 가운데도 가장 찰흙 같은 암흑기에 시인은,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흰 돛 단 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 내가 바라는 손님은 (x2)고달픈 몸으로 /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민족의 위대한 희망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온 천지가 암흑기였던 시기에 하나님을 나타내러 오신 분입니다. 그렇게 오신 예수님은 이 땅에서 버려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긍휼이었고 온유하였고 가르치고 설교하고 치유해 주셨습니다. 그가 만난 모든 사람에게 축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을 만나게 된 우리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같은 그리스도께서 왜 죽어야 했습니까? 바울은 로마서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그분이 죽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부드럽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끔찍하고 잔인하고 고통스럽고 천천히 사람을 말려 죽이는 피의 죽음이었습니다. 신약 학자 도미닉 크로센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국가가 후원한 테러리즘’이라고 말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 지도자들이 모의했고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의 정치권력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구타를 당하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망 간 것을 묵묵히 지켜보았습니다. 그는 모욕을 당했으나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으셨습니다. 못자국의 고통 가운데서도 결코 비명을 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을 때, 더 이상 그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고난의 정점에 서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완전히 아버지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습니다. “버림받음”은 사실상 예수의 middle name이었습니다. 그의 양 무리 (이스라엘)는 그를 버렸습니다. 그의 가족들이 그를 버렸습니다. 그의 친구들조차 그를 버렸습니다.

사도행전 9장에서 바울은 태양이 작렬하는 정오에 다마스커스 로드에서 그 태양보다 더 밝은 빛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실명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 현현하신 주님께 “당신은 누구이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 질문 후에 주님에게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KJV역, 행9:6)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그랬더니 주님이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네가 해야 할 일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이후의 생애 중에 매일 주님에게 묻는 질문이 되었습니다.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질문은 또한 우리 모두가 매일 하루를 시작하며 주님에게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저는 오늘 이 질문을 저와 여러분의 삶의 기초로 삼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그를 누구라고 말합니까? 위대한 예언자? 예,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훌륭한 선생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상에 오신, 저와 여러분에게 직접 내려오신 유일한 하나님의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가 저와 여러분의 구속주임을 선언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라고 매일 물을 수 있습니까?

백동인목사ㅣ갈보리장로교회